[주요뉴스] "수용소의 노래" 마지막회
  • 관리자
  • 2010-07-16 11: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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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드디어 2월 16일이 되었다. 우리 온 가족을 포함한 관리소 사람들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아침 8시에 1반에 있는 회관에 집결했다. 회관 안에 사람들이 꽉 차자 언제나처럼 관리소장이 나타났다. 또 중앙기관에서 국장이란 자도 나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김정일의 생일 축하와 그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했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김일성 찬양노래와 김정일 찬양노래를 합창시켰다. 이렇게 통례적인 행사가 다 끝나고 나서 중앙기관의 국장이란 자가 입을 열었다.
 

국장: “이제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배려로 혁명과업을 마치고, 새 정치적 생명을 받게 되는 동무들의 명단을 발표하갔다.”

설화: 회관에 꽉 찬 사람들의 숨소리가 갑자기 멈춘 듯 조용해졌다. 그는 먼저 원주민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몇몇 거명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북송교포 마을의 몇 사람들을 호명했다.

국장: “한학수의 가족 4명, 송옥선과 가족 4명, 홍충일 등 형제 5명, 현룡의 가족, 박태종의 가족, 서일선의 가족, 이상!”

설화: 내 귀를 의심했다. 꿈이 아닐까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두 번째로 부른 이름이 분명 우리 할머니 이름 같았는데,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고개를 돌려 삼촌을 바라보니 그의 두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삼촌의 손을 잡았다. 삼촌은 응답이나 하듯 더 세게 내 손을 쥐었다. 맞구나! 사실이구나! ‘정말이지 이게 꿈은 아니구나.’

호명이 다 끝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교포 가족들이었다. 명단에서 빠진 사람들은 우리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할머니를 붙들고 몸부림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날 밤. 둘러앉은 우리 식구들은 말을 잊은 듯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식구 모두가 ‘출소’라는 생소한 단어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10년간이나 지속된 수용소 생활이 과연 끝나는 것인지 쉽게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철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 속에 들어와 지금은 청년이 되었다. 혹독한 구타와 욕설, 병마와 싸우면서, 그래도 봄이면 피어나는 나무의 새싹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그 동안 우리 주변에선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탈출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먼훗날 이 요덕수용소에 와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아마 땅 속에 묻힌 한 많은 백골을 수백 가마니는 실히 파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요행히도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비록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어버렸고, 아버지는 40대 중반인데 70대 노인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결국 살아남은 것이다. 그것은 분명 기적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쌀 짐도 별로 없었다. 절구와 가마, 맷돌, 헌이불, 찌그러진 궤짝이 전부였다. 나는 내가 쓰던 톱, 도끼, 작업복 등을 출소하지 못하는 동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보위원이 와서 우리에게 ‘공민증’이란 것을 나누어주었다. 읽어보니 직업란에 ‘2915 부대 농장원’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군부대의 노무자로 알 것이었다. 우리는 짐을 들고 부락 앞으로 나갔다. 우리와 함께 나갈 여섯 가구도 나와 있었다. 조금 있으니 트럭 한 대가 와서 섰다. 보위원들과 삼촌이 트럭에다 짐을 실었다.

부락사람들이 울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무리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했어도 10년 동안 정들었던 부락이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을 놔두고 우리만 나간다는 것에 무척 마음이 아팠다. ‘언제가 되어야 이곳 수용소의 정치범들이 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 식구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했지만, 보위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였다. 곽향숙 누나도 나와서 울고 있었다. 향숙이 누나는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시집을 갈 수가 없었다. 수용소 안의 처녀들은 향숙이 누나처럼 그대로 늙어갔다.

‘불쌍한 누나! 마음이 무척 착한데…….’ 나는 마음뿐 어떠한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상처만 긁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친했던 얼굴들의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았다.

‘곧 출소하게 될 거야. 절대로 희망을 잃지 마라.’

나는 눈으로 말해주었다. 그러는 나의 어깨위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눈발 속으로 우리가 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별인사 나온 사람들의 흐느낌소리가 귀가에 맴돌았다.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10년 동안 다니던 원한의 첩첩 산들이 우리의 뒤로 물러났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작업하던 산들이었다.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조명탄을 쏘듯 한순간에 떠오르기도 했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날리는 눈보라가 그 눈물에 녹아 함께 흘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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