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권력승계] 3대혁명소조운동이 권력승계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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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1 10: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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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소조운동의 가장 주목할 성과는 당-정권기관의 강화이다.

소조원들이 소위 ‘사상혁명’을 촉진하여 당조직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북한체제의 안정화 즉 유일지도체제 형성에 에 크게 기여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당의 기층조직을 강화하고 당 조직생활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즉 소조원들의 활동에 의하여 당원들이 당규약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당조직 생활 및 당정책 학습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또한 3대혁명소조운동의 시행에 따라 당의 정무원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력하고 집중되었다.

정무원(현 내각)에 대한 통제를 기존의 당조직에서 수행했던 것에 비해 소조원들이 실무적인 지도와 검열을 함으로써 김정일에게 직접적인 보고시스템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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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3대혁명소조운동의 지휘체계
◆출처: 「 로동신문 」1984년 9월 25일자


3대혁명소조원들은 막강한 권한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지만 당조직을 뛰어넘지는 않았다.

이들은 ‘김일성’이름이 박힌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모든 당 간부들의 사업자료가 월1회 중앙당 3대혁명소조 본부에 보고되는 직보체계가 세워졌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국가운영과 현 상황을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업부문에서는 당중앙위원회의 견제와 통제를 직접 받지만 조직지도 부문, 특히 사상사업과 관련해서는 근로단체 담당비서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다. 이는 사업과 사상 부문에서의 이중적 관리체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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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조직지도부 조직표
◆출처: 이우정, 『 권력승계와 정당성 』(서울: 신태양사, 1997), p.240.


2. 정치의 경제간섭 현상의 심화

3대혁명소조운동이 실시되면서 당의 경제기관의 지도가 강화되었다.

아울러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도 다시금 강조되면서 오로지 수령의 교시와 당정책에 근거하여 집체적으로 토의,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당의 무분별한 지도는 행정경제기관들 간부들 사이에서 수직적관계의 질서파괴라는 결과를 낳았다.

김일성은 1980년 정무원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정무원 위원장과 부장들이 총리와 부총리의 지시에 잘 복종하지 않는다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생산에서 기술혁신과 과학적 방법을 통한 경제운영이 필요하였지만 경제건설에 있어서 사상혁명이 제일 중심에 있었기에 경제문제를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하려했기 때문이었다.

기술수준의 상대적 저하, 외화부족, 군사비 부담, 투자배분상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경제 전반에 불균형을 초래하여 생산성을 저하시켰다.

또한 이 과정에서 국가의 물리력에 의한 통제를 강조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기존의 법 관련 기구이외에 ‘사회주의법무생활위원회’를 구성하여 관할 지역 안의 법생활에 대해서 주권적 기능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법적 통제가 강조되면서 당적 통제와 사상투쟁은 더욱 강력한 제도적 기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3. 계획의 실패와 생산성의 일시적 증가

3대혁명소조운동을 진행하면서 겪은 문제들은 여러 가지 있지만, 계획 작성에서의 혼란은 경제적 실효성을 떨어뜨리는데 큰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만성적인 자재의 부족, 자재공급체계의 혼란은 경제구조의 복잡함과 막대한 낭비 현상을 초래하였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자재의 부족 현상을 공급의 확대라는 경제적 방식의 아닌, 관리와 감독의 강화를 통한 숨어있는 자재 찾아내기라는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해 나갔다.

계획의 변형을 통한 운동의 지속은 낙후되었던 농촌의 기계화, 과학화를 추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우선 순위’에 의한 계획은 체제의 모순으로 나타났다.

4. 사회변화 촉진과 사회 갈등 유발

북한은 3대혁명소조운동을 통하여 정치 사상적 절대 우위를 점하며 노력과 동원에 정치적 유인(誘因)을 부여했다.

소조원들은 활동이 종료된 이후 대대적인 입당과 사로청으로의 입단이 이루어졌다.

1984년 9월에 진행된 <3대혁명소조원대회>에서 황장엽은 1만 6000여 명이 입당, 6600명이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화선입당의 기회 부여가 이루어진 이후에 입당이라고 하는 정치적 유인(誘因)이 부여되었고, 여성의 경우 사로청에 가입이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입당의 의미는 신분상승의 기회이다. 김일성은 또한 현지지도 현장에서 청년 모범 소조원에게 파격적인 입당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인(誘因)은 과학기술과 지식인 양성 체계간의 모순을 가속화시켰다.
대졸자중 60-70%이상이 소조원으로 활동해 왔는데, 군경력과 함께 소조원의 경력은 입당 및 간부 등용에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젊은 대학생들이 전공과는 동떨어져 사회경제적 낭비 및 과학기술의 퇴보현상까지 나타났다.

지식수준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북한은 구체적으로 외국어 및 한자교육과 조총련으로부터 기술도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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