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20대때 독일 간 간호사 "가족 울까 편지도 참아,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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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4 10: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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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2] 50년전 독일로 떠난 딸들

獨 병원측이 '동백아가씨' 틀어주며 한식 차린 날
양배추 김치에 목메어 부둥켜 안고 눈물만…
라인江 기적 독일인도 '야근 악바리'에 놀라더라
그 눈물젖은 외화가 내 부모·형제·조국을 일으켜
 

파독 간호보조원(현 간호조무사) 출신의 재독 화가 노은님(67)씨의 작업실은 독일 남서부 2만명이 사는 작은 도시 미헬슈타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성(城)이었다. 250년 된 성에서 화가는 올해 미국에서 열리는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새와 물고기 그림이 집안 곳곳 가득했다.

노씨는 24세 때인 1970년 독일로 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어디로든 멀리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연히 '파독 간호원(간호사) 모집'이란 신문 광고를 보고 주저 없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외항 선원 사고가 많은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시립외과병원이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선원들이 거의 매일 들이닥쳤다. 일은 고되고, 낯선 나라에서 홀로 지내는 하루하루는 외로웠다. 그 힘든 날들을 견디기 위해 고향 전주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씨가 어느 날 몸이 아파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 그동안 그린 그림 수십점을 보게 됐다. 간호부장은 "병원에서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노씨는 "전시회를 열었더니 그림이 팔렸다. 내 1~2년치 연봉을 내고 그림을 사간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전시회가 끝나자 이번엔 병원장이 추천서를 써줘 함부르크 국립 조형예술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모교 교수가 됐고 동료 독일인 교수와 결혼했다. 1982년 고(故) 백남준의 주선으로 고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icon_img_caption.jpg 화가 노은님씨와 남편 게르하르트 바치씨. 노 화가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남편은 이 대학의 동료 교수였다. /미헬슈타트(독일)=양모듬 특파원
파독 간호사 사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됐다. 광부 파견과 비슷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부족한 간호 인력을 한국에서 충당하길 원했고 우리 정부는 간호사들이 송금한 외화를 경제 발전에 투입하려 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사업이 본격 시작하기 전 민간 차원에서 떠난 간호사까지 포함해 1만1057명이 당시 독일로 갔다. 현직 간호사를 비롯해 단기 교육을 받은 간호조무사들이 독일 각급 병원에서 일했다. 간호사는 야근이 많아 독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힘든 직업으로 통했다.

icon_img_caption.jpg 정부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인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야근을 자청하며 돈을 벌어 조국의 부모 형제들 생활비와 학비로 보냈다. 사진은 1960년대 한복을 차려입고 독일의 한 공항에 내린 파독 간호사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독일로 간 한국 여성 간호사들은 부지런히, 악착같이 일했다. 수당이 많은 야간 근무를 도맡아 했고, 쉬는 날에도 다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69년부터 3년간 듀스부르크시립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했던 윤기복(67)씨는 "그땐 정말 수도 없이 야근을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신생아 병동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목욕을 시켰다. 15일간 야근하면 10일을 쉴 수 있었다. 남들이 한 달 700마르크 벌 때 윤씨는 병원 두 곳에서 야간 근무를 하며 1200마르크를 벌었다.

4남매의 장녀인 윤씨는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다가 진 빚을 갚아야 했고, 동생들 학비도 대야 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화가 노은님씨도 "김치 담그기 위해 양배추 사는 돈을 제외하곤 거의 전액을 부모님께 보냈다"고 했다. 노씨는 "돈을 보내면서 외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가족이 내 편지 읽으며 운다는 걸 알고는 돈만 보냈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처음엔 "한국 간호사들은 돈 욕심이 많은가보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간호사들이 죽기 살기로 일하며 번 돈을 가족들 생활비로 보내거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icon_img_caption.jpg 독일의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인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의사·간호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파독 간호사들의 근면한 모습은 독일인들에게도 감동을 줬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꽃다운 20대, 타향살이의 설움이 터져 나올 때면 간호사들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윤기복씨는 병원 측이 한국인 간호사를 위해 마련해준 한식을 먹으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베트남 쌀로 지은 푸슬푸슬 한 밥에 양배추 김치를 보니 목이 메었다. 그는 "우리를 위한다고 병원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틀어줬는데 그걸 들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한 설움은 없었다.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간 백정신(68)씨는 "파독 간호사는 독일인 간호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외국인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했다. 베스트팔렌 소아과병원에서 근무했던 황보수자(71)씨는 "독일 간호사보다 인간적으로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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