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장군님 아들이나 탄광 보내라” 말에 수용소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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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1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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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

"김정일의 지시로 탄광에 집단배치를 받게 됐을 때 나는 악에 받쳐 `나라가 그렇게 어려우면 장군님(김정일)의 아들들이나 탄광에 보내라'고 소리쳤다. 결국 6개월간 보위부 조사를 받고 나서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대표 김태진)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인권의 달' 행사의 하나로 `북한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요덕수용소에 수용됐던 김기철 씨의 죄목은 `말 반동'이었다.


김 씨는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이유로 대학에도 못 가고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겨우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제대군인들을 탄광에 집단적으로 보내라는 당국의 지시에 항의하다가 수용소에 끌려갔다.

김 씨는 수용소에서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를 만났다고 전했다. 그는 "혜원(신 씨의 장녀)이네를 서독에서 왔다고 `서독집'이라고 불렀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혜원이네 땔나무를 해줬다"고 말했다. 신 씨 모녀는 오길남 씨가 북한을 탈출한 것에 대한 `괘씸죄'로 수용소에 끌려갔다고 김 씨는 주장했다.

한편 북한 무역성 러시아 지구 외화벌이 책임자였던 장영걸 씨는 `외화를 아주 잘 번다'는 이유로 1997년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 장 씨는 "북한 당국은 1년에 100만 달러 이상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실적이 좋은 외화벌이 사업자들을 체포해 조사했다"며 "당시 외화를 잘 벌어 체포된 사람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전했다.

오빠가 회령 22호 정치범수용소 관리요원(보위부원)이었다는 허영미 씨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22호 수용소 내부에 있는 보위부 사택에서 살면서 수감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허 씨는 "22호 수용소는 일단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한다. 수용소 주변은 깊은 함정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비가 철통 같다"며 "22호 수용소에서 풀려나거나 도주해 나왔다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우리 형제가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데 한국 국민이 이들을 외면한다면 역사의 죄인으로 지탄받게 될 것"이라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는 오는 10월 중순께 영문으로 된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수기집'을 출간해 유엔에 제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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