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소식] 탈북 할머니들 '눈총' 대신 '갈채' 받다
  • 관리자
  • 2010-05-10 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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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으로 온 할머니로 구성된 '실버연예봉사단' 새해 첫 공연
"한국생활 적응 못한다고 천덕꾸러기 취급 받지말자"
지난해 10월 창단 이후 경로당·복지관 돌며 활동

"고저 환영합네다. 재미있게 즐기시라요."

5일 오전 11시30분쯤 서울 강서구 가양 7복지관 강당에서 한 여성이 나와 북한 말투로 공연 시작을 알렸다. 이어 황해도 민요 '몽금포 타령' 장단이 흐르자 부채에 노랑 저고리, 녹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 7명이 무대 위로 나와 흥겨운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들은 "덩기덕 쿵더덕" 하는 장단에 춤을 추며 부채를 이리저리 흔들며 관객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당 안에 모인 50여명의 관객은 박수로 장단을 맞췄다. 춤꾼들이 둥글게 돌며 부채꽃을 이루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꽃잎처럼 흔들리는 부채 사이로 주름 깊은 여성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균 나이 61세인 '할머니 예술단'이 펼친 새해 첫 공연이었다. 단장과 단원 모두 평생을 북녘땅에서 보낸 탈북(脫北) 할머니들이다. 지난해 10월 '실버연예봉사단'을 창단한 뒤 경로당과 복지관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해왔다. 이날은 가양동 지역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무대였다.

북한 말투로 공연 막을 올리지만 이들이 펼치는 공연 내용은 남한식이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에 맞춰 태극기를 흔들고, 구성진 목소리로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멋들어지게 뽑는다.

5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가양7복지관에서 탈북 할머니들로 구성된‘실버연예봉사단’이 지역 노인들을 위한 무용 공연을 하고 있다./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단장을 맡고 있는 고매화(49)씨는 "한국 노래는 우리 삶의 참다운 맛을 보여준다"며 "대한민국에 빨리 정착하고 싶은 마음에 공연을 하면서 한국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남한 노래를 부르니까 더 푸근한 장맛이 난다", "이 좋은 공연을 우리만 보기 아깝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봉사단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해 10월 19일이었다. 1999년에 북한을 빠져나와 2007년 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씨가 모임을 주도했다. 함께 북한을 탈출한 딸이 중국 공안에 잡혀간 뒤 신의주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시작한 일이다.

 
공연을 펼치며 노인들에게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은 처지(탈북)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우리들이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탈북주민들에게 모범이 되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지요."

고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강서구 지역의 탈북자들 가운데 평소 알고 지내던 할머니들을 찾아갔다. 대부분 한국 생활을 힘겨워하던 사람들이었다. 2005년 한국에 들어온 김모(63·2002년 탈북)씨는 "북에 두고 온 두 딸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먹고 자살하려고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만 잘 먹고 잘 산다'는 죄책감에 술에 찌들어 살다 동네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다른 단원 문모(65·2005년 탈북)씨도 "1년 반이나 걸려 한국에 왔는데 모은 돈 200만원과 빌린 돈 300만원을 다단계 사기로 잃고 남들의 시선을 피하며 살아야 했다"고 했다.

인생을 포기하거나 숨어지내던 그들에게 고씨의 제안은 새로운 목표를 던져줬다. 조모(61·2007년 탈북)씨는 "나이도 많고 몸도 안 좋아 망설였는데 운동하면서 춤도 배우고 즐기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문씨도 "두만강 건널 때 이렇게 (남의 눈을 피해가며) 살자고 온 게 아니었다"며 "남한에서도 기쁜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여 8명이 단원이 돼 '실버연예봉사단'을 창단했다. 이들은 하루 4시간씩 맹연습을 했다. 그리고 창단 8일 만에 강서구에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첫 무대를 가졌다.

작년 12월에는 강서경찰서에서 탈북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갈고 닦은 춤과 노래솜씨를 뽐냈다. 강서경찰서 조규형 계장은 "(할머니들이) 예전에는 슬퍼만 하고 말도 거의 없었는데 이젠 농담도 잘하고 얼굴빛이 환해졌다"고 말했다. 이들 탈북 할머니들은 5일 공연까지 모두 8차례 강서구 지역 노인들과 탈북자들에게 공연행사를 열었다.

전문가들은 탈북 할머니들의 이런 문화 활동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찾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동국대 북한학과 김용현 교수는 "탈북자 1만명 시대를 맞이해 탈북 노인문제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경제적 능력도 떨어지고 북한에 대한 향수도 남아 있어 탈북 노인들의 공연활동은 권장할 만하다"고 했다.

다음 공연 대상을 국군 장병과 소방관들로 잡고 있는 할머니들의 새해 포부는 남다르다.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 군인과 소방관들 고생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Nk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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