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단체동정] 포스트 황장엽’ 홍순경, “망하던 北, 남한이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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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9 19: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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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49재가 되는 날이다. 고인은 최고위급 탈북자였고, 국내 탈북자 사회의 구심점이었다. 탈북자 단체 연합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를 2007년 조직해 위원장을 맡고 북한 민주화 운동을 지휘해 왔다.

홍순경(72) 탈북자동지회장은 이날 아침 탈북자 단체 간부들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고인의 묘소를 참배한다.

그는 지난 10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다. 황장엽 사후 탈북자 사회를 이끌 새로운 리더가 된 것이다.

황장엽의 최측근

“황 선생의 일을 계승하는 게 기본적으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황 선생은 탈북자 단체들의 연합을 꿈꿨습니다. 연합의 힘으로 북한 민주화와 한반도 통일에 이바지하자는 게 그분의 뜻이었지요. 탈북자들은 통일의 역군이다, 튼튼히 준비했다가 북한에 이상 사태가 나면 우리가 들어가서 북한이 민주화로 가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홍 위원장은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단어도 신중하게 골라서 썼다. 그에 따르면, 황 전 비서는 죽기 전날도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특별한 병을 앓지도 않았다. 깨끗한 죽음이었다. 유언은 따로 없었다. 홍 위원장은 “2008년 새해 아침에 쓴 자작시가 황 선생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이별’이라는 그 시에는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보따리를 홍 위원장이 맡은 셈이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국내 30여개 탈북자 단체 중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20여개의 연합체로 출발했다. 북한전략센터 김광인 박사는 “북한민주화위원회는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탈북자 단체”라며 “탈북자 출신 명망가들 대부분이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임 위원장은 선거로 결정됐다. 김성민(49) 자유북한방송 대표와 둘이 후보로 나왔다. 말하자면 신·구 세대 간 대결이었다. 홍 위원장은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해야죠. 그런데 순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나를 뽑아준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홍 위원장은 고인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해온 인물로 꼽힌다. 황장엽 위원장 시절 5명의 부위원장 중 그가 수석이었다. 또 1999년 고인이 만든 탈북자동지회를 맡아 2001년부터 이끌고 있다. 고인의 장례식을 주도한 ‘10인 위원회’ 멤버였고, 하관식에서 약력을 보고한 이도 그였다. 국립묘지 안장 등 정부가 고인에게 보여준 예우를 그는 고마워했다.

“황 선생은 단순한 탈북자가 아닙니다. 북한에서도 최고 이론가였고, 북한 정권의 두뇌 역할을 하던 사람이에요. 북한의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거사를 한 겁니다. 선생을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있는데, 75세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으로 오겠습니까? 북에 있는 선생의 가족과 친구, 친척들은 다 잘못됐어요. 남한에 와서 황 선생이 한 일이 도대체 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분은 정치가나 활동가가 아니라 사상가, 이론가였습니다. 97년 75세로 와서 88세로 돌아가시기까지 26권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지난 정부 10년간은 공개 활동도 거의 못하게 했어요. 그래도 지금 정부가 그분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려준 겁니다.”

목숨을 걸지 않은 탈북은 없다

홍 위원장은 99년 태국에서 탈북했다. 북한에서 65년부터 공무원 생활을 했다는 그는 무역상 부국장을 지낸 후, 91∼99년 태국 방콕 주재 북한대사관에 과학기술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귀환 명령을 받고 북한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탈북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북한이 5년 내에 망할 거라고 봤어요. 사람들이 굶어죽고, 총살당하고, 강도가 끓고, 그런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다 무너지던 걸 남한과 국제사회가 되살려줬어요. 엄청난 지원을 해가지고.”

99년 3월 9일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대사관을 탈출한 홍 위원장은 방콕 외곽에 숨어있었다. 좀 조용해지면 외국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캐나다나 미국, 호주 등 교포들이 많은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보름 만에 북한 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그와 부인을 태운 차가 라오스 국경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전복됐다. 부부는 부상을 입었고, 사고 현장에 나온 태국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병원에서 태국 경찰과 유엔난민구치소에 구조를 요청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태운 차는 그대로 달렸다. 부부는 아들 때문에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죽는 것만이 아들에게 가해질 피해를 줄이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로 이마를 내려치기도 했고, 수술용 가위로 배를 찌르거나, 화장실 벽에 머리를 찧기도 했다. 태국 이민국 감옥에 갇힌 후에도 부부는 밥도 먹을 수 없었고 잠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태국 정부에 아들을 살려달라고 계속 글을 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 한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태국 총리가 나선 것이다. 아들은 당시 북한대사관에 갇혀 있었다. 총리는 북한대사관을 상대로 “젊은 청년을 부모에게 돌려보내라. 그러지 않으면 세계가 너희를 저주하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 “북한대사관을 철수시키고,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경고했다. 남의 나라에서 경찰을 매수해 탈북자를 색출하는 북한의 행태에 단단히 화가 났던 것이다. 북한은 아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태국 정부는 약속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아들을 석방했다는 이유로 북한 외교관 6명을 추방할 만큼 강경했다.

홍 위원장은 “목숨을 걸지 않은 탈북은 없다”며 “이제 와서 이 얘기를 털어놓는 이유는 그동안 아들에게 혹시 해가 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세에 남한으로 온 홍 위원장의 아들은 현재 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또 한 명 있다. “큰애를 못 데리고 나왔다”고 말하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북한에 남은 맏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너무 몰라요

“여기 사람들은 북한을 너무 몰라요. 북한을 안다면 북한 옹호하는 세력이 있을 수 없거든요. 거기에서는 여전히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이 목표 아녜요? 여기서는 강아지들이 이밥은커녕 전문식품만 먹고 사는데. 사람도 못 먹는 이밥에 고깃국을 개들도 먹는다는 것, 이런 진실을 거기다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대북 전단이나 방송이 매우 중요해요.”

북한은 남한을 모르고, 남한은 북한을 모른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을 알리고,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을 알리는 것, 그게 홍 위원장이 생각하는 탈북자들의 역할이다.

“남한에서의 이념 갈등을 해소하는 데 탈북자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을 체험한 탈북자야말로 어디가 좋은 사회인지 잘 압니다. 북한의 실상을 남한 사람들에게 알려서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귀한지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남한에서 잘 모르고 좌왕우왕하는 사람들을 바로 잡아줄 수가 있어요.”

홍 위원장은 탈북 당시부터 자신의 할 일을 북한 민주화 운동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생계형 탈북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들이 말하는 북한 민주화 운동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것일까?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것인가?

“우리가 북한 정권을 바꿀 순 없죠. 그러나 외부에서 북한에 대해 일정한 영향을 가할 순 있어요. 핵을 포기해라, 개혁개방으로 나와라, 그러면 국제사회가 도와줄 것이다, 이런 집중된 목소리를 세계가 북한에 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북한의 명줄을 쥔 건 중국이에요. 중국과의 관계를 밀접히 해서 중국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한국에서도 북한 인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일치된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죠.”

홍 위원장은 “북한을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끌어내는 게 우리의 목표”라며 “개혁개방만 돼도 통일은 60% 이상 달성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장 북한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탈북자 그룹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홍 위원장 설명이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인권운동

북한민주화위원회는 1년 전 서울 광화문에서 논현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이전하면서 위원회 규모는 상당히 축소됐다. 일하던 직원들이 다 나가고 여비서 1명만 남았다. 재정상태가 열악해서 홍 위원장은 월급 한 푼 받지 않는다.

“그동안 사실 위원회가 활동을 제대로 못했어요. 지금은 사무실 유지도 어려워요. 정부에서 받는 돈은 없고, 민간에서도 지원하는 곳이 없어요. 그나마 교회들이 좀 도와주는 편이죠. 오죽하면 황 선생 49재 지낼 비용이 없어서 우리끼리 돈을 걷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홍 위원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누구 지원해줄 분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탈북자 2만명 시대라는데, 탈북자 최대 단체의 행색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 위원장은 조직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떠안고 있다. 지원이 생긴다면 어떤 일을 제일 먼저 하겠느냐고 물어봤다.

“일단 중국에서 탈북자들이 북송되는 것부터 막아야 합니다. 북송 되는 거 보고 북한 주민들이 무서워서 못 떠나요. 중국에서 활동을 벌여야 하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 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그래도 황장엽이라는 거물의 그늘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해나가야죠.”

홍 위원장은 북한 민주화 운동이 정치운동이 아니고 인권운동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가 북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북한 문제는 정치문제나 이념문제가 아닙니다. 인권문제예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북한인권 이상 중요한 인권문제가 있나요?”

홍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전화를 했다.

“북한이 자기 본심을 지금까지 숨기느라고 노력해 왔다면, 이제는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 겁니다. 파렴치하고 노골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고도 북한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 되죠. 이런 노골적인 사실 앞에서 여전히 북한을 두둔하거나 추종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내내 부드럽던 그의 말이 결국 격해지고 말았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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