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소식] '열한살의 유서' 작가 "北단짝 위해 인권운동 계속"
  • 북민위
  • 2023-09-20 06: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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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때 헤어진 친구 선화가 나처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까지 북한인권운동을 계속할 거예요."

8개 국어로 출간된 회고록 '열한 살의 유서'의 저자 김은주(37) 씨는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26년 전 탈북하면서 헤어진 초등학교 단짝 친구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2006년 한국에 들어온 김 작가는 회고록 발간 외에도 북한인권단체 자원봉사, 대북 라디오 방송, 국내외 강연 등 활동을 꾸준히 했다. 지금은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FSI) 간사로 있다.

김 간사는 "중국 도착 첫날 14살이던 언니가 대로에서 납치돼 성폭행당했다"며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인권침해가 심각한 중국을 국제적으로 압박해 북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정당하면 자괴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외톨이가 된다"며 "탈북민에게 일방적으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 한국 국민의 탈북민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문답.

-- 열한 살에 유서를 쓰게 된 계기는.

▲ 아오지 탄광으로 알려진 함경북도 은덕(경흥)군에서 살았다. 11살 때인 1997년 11월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언니가 먹을 것을 구하러 갔는데 약속한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왕복 2㎞를 걸어 마중을 나갔지만, 엿새째는 힘이 없고 죽을 것 같아 누워 있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일어나 울면서 유서를 썼다. 어머니에게 "보고 싶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여러 번 마중 나갔었습니다. 왜 돌아오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기적적으로 어머니와 언니가 그날 돌아왔다. 김일성 초상화를 떼 틀을 장마당에서 팔고 먹을 것을 산 뒤 세 모녀가 노숙 생활을 했다.

김은주 FSI 간사 회고록 '열한 살의 유서' 표지
                                            김은주 FSI 간사 회고록 '열한 살의 유서' 표지

-- 언제 탈북했나. 

▲ 1999년 춘제(春節·중국의 설)인 2월 18일 강을 건너가면 먹을 것이 많다고 해 다 같이 탈북했다. 그런데 중국 도착 첫날 밤 언니가 큰길에서 지나가던 차에 납치됐고 성폭행당했다.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14살이었다. 다음 날 새벽에 차에서 버려진 언니를 만났지만 24년간 그 사건을 얘기하지 않다가 중국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 최근에야 공개했다. 어머니가 투먼(圖們)시 스셴(石峴)진 시골 마을에 팔려 가는 바람에 언니와 나도 같이 가서 농사를 지었다. 동생이 태어난 지 1년이 안 된 2002년 4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어머니, 언니와 함께 북송됐다.

-- 북송 과정은 어땠나.

▲ 중국 변방수비대에서 북한 회령보위부로 넘겨졌다. 알몸 신체검사 때 움츠리면 '쓰레기만도 못한 것, 모자란 년'이라고 욕하며 발길질했다. 좁은 감옥에서 40명이 갇혀 거의 앉은 채로 자야 했다. 온성 노동단련대에선 어머니가 오한으로 쓰러져 죽다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청진의 도집결소로 갔지만 북한 주민으로 조회가 안 돼 최종 이송지가 결정되지 않았다. 아사자가 많은 탓에 행방불명으로 3년 지나면 사망 처리됐기 때문이다. 은덕 출신 탈북민을 이송하러 온 이에게 떠맡겨졌는데 경비와 음식이 없던 인솔자가 우리를 풀어줬다.

-- 두 번째 탈북 과정은.

▲ 2002년 6월 풀려나자마자 회령으로 가서 재탈북했다. 스셴진 시골집에 다시 갔다가 언니와 나는 일자리를 찾아 나왔다. 어머니가 시골집에서 탈출한 뒤 옌지(延吉), 다롄(大連), 상하이(上海)를 떠돌아다니다가 한국행 브로커를 만났다. 2006년 5월 어머니와 함께 중국을 벗어나 그해 9월 1일 한국에 입국했다. 중국에서 가정을 꾸린 언니는 2008년에 왔다.

김은주 탈북민 글로벌교육센터(FSI) 간사
                                           김은주 탈북민 글로벌교육센터(FSI) 간사

-- 한국 생활은 어땠나.

▲ 2007년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다섯살 어린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다. 2009년 서강대에 입학해 중국언어문화와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2012년 프랑스 출판사를 통해 '열한 살의 유서'를 일간 피가로 서울 특파원과 공동으로 발간했다. 이후 한국어, 영어 등 7개 국어로 추가 출간했다. 2015년 북한 인권 활동을 했던 탈북민과 결혼했다. 남편은 현재 통일부 공무원이며 여덟살과 두 살 된 아이들이 있다. 2017년 국방부 대북 라디오 방송 '자유의 소리'에서 작가로도 활동했다.

-- FSI 근무 이유는.

▲ 작년 7월부터 간사를 맡아 탈북민이 국제사회와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도록 돕고 있다. 북한 생활이나 남한 정착 과정 등 자신의 이야기를 영어로 나누고 싶어 하는 탈북민에게 원어민을 매칭한 영어 스피킹 훈련을 무료로 제공한다. 지난 5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제네바 정상회의'에서 북한 인권 현실을 증언한 한송미 씨가 FSI에서 교육받았다. 201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세계젊은지도자회의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호소해 영국 BBC방송의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된 박영미 씨도 FSI를 거쳤다.

-- 북한 인권 상황의 개선 가능성은.

▲ 2000년 중반 공개 처형에 대해 국제사회가 비판 목소리를 높이자 공개처형 횟수가 줄었다고 들었다. 북한 정권과의 대화를 위해 인권을 포기하면 안 되며 인권 관련 압박을 계속 해야 한다. 재중 탈북민 북송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도 압박해야 한다. 항저우(杭州) 아시안게임을 전후해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물밑 외교 대신 수면 위로 드러내야 중국 정부가 압박을 느낄 것이다.

-- 탈북민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조언은.

▲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탈북민 출신 자녀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학부모들을 보게 됐다. 학부모 모임에서 정체성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 사투리를 쓰지 않도록 조심하게 됐다. 최근 심리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일부 탈북민이 고독사하는 것은 '소극적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원이나 남북하나재단 등에서는 탈북민들에게 '너만 바뀌면 돼'라는 식의 일방적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 국민이 탈북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과 탈북민 중 여성이 70%인 점 등을 고려해 탈북민 가정과 다문화 가정을 구분해 대응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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