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탈북人](22)"독재사회 北, 농업 자율성이라도 보장해야"
  • 북민위
  • 2023-09-11 06:16:38
  • 조회수 : 283

북한 수의직 공무원 출신 농업 전문가인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60)은 지난 7일 서울 양재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은 일한 만큼 분배받고 능력에 따라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당과 정부의 강압이 농업 생산자의 자율성을 억제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조 소장은 "1년에 200㎏밖에 안 되는 식량을 분배받지 못해 생산 농민이 굶고 있는 상황인데 식량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적어도 농촌만이라도 자율성을 부여하는 변화가 만들어져야 식량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북송 재일교포의 2세이기도 한 그는 "토대와 계급적 출신을 우선으로 보는 북한 사회에서 3계층 중 최하위 '적대계층'인 북송 재일교포는 미래가 담보될 수 없다"며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어 10년간 철도 건설장에서 고생했지만 인정받는 데 한계가 있었고 자식들도 같은 전철을 밟아야 했다"고 토로했다.

조 소장은 "북한이 해외 근로자 중 환자와 남한행 탈북이 예상되는 이들 위주로 먼저 북송하고 있다고 한다"며 "중국 공안에 억류된 탈북민을 다시 풀어줘 경제활동을 하도록 하거나 본인 의사에 따라 한국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문답.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

-- 부모 모두 재일교포인가.

▲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경북 영일군(포항시)이 고향이다. 일제 때 일본 히로시마에 갔다가 1960년 북송됐다. 북송된 10만명가량의 재일교포가 여권을 뺏긴 채 광산과 제철소, 제련소, 농촌 등에서 전후 복구를 위한 '노력 보충'으로 활용됐다. 부친은 자강도 희천 광산에 배치됐다. 어머니는 오사카에 살다가 같은 해 북송됐다. 집과 교육, 음식을 무상으로 준다고 거짓말해놓고 소량의 강냉이밥만 줬다. 부친은 대학 다닐 때 기숙사 밥으로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어 처가 도움을 받기 위해 결혼을 했다.

-- 북한 생활은 어땠나.

▲ 북한에서 재일교포나 2, 3세는 강고한 '유리천장' 때문에 권력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승진도 제한된다. 간첩으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도 봤다. 1982년까지 귀국자 출신은 '당과 수령을 지키는 총대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며 군에도 안 보냈다. 당원이 되려고 중학교 졸업 후 17살에 '속도전청년돌격대'(기간·산업시설 건설 담당 청년대중조직)에 들어가 10년 동안 철도 건설 현장에서 고생한 것을 인정받아 평성수의축산대에 입학했다. 이 같은 대체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치고 1996년 1월 평성시 농업경영위원회에서 축산 공무원으로 근무했고 2006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지방공업관리국에서 근무했다.

-- 북한에도 반려동물 문화가 있나.

▲ 1990년대 들어서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문화가 생기기는 했는데 풍산개나 셰퍼드 등 대형견이 많다. 산책하고 먹이를 주는 등 같이 생활하지만, 옷을 입히거나 동물병원에서 치료해 주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애완동물이 나이가 많이 들면 판매하거나 식용으로 쓰기도 한다.

-- 탈북 계기는.

▲ 군에도 갔다 왔지만 계속 감시당하고 승진 기회를 주지 않아 불만이 생겼다. 아들이 조선체육대학 소속 권투 선수였는데 아시안게임 선발 대회서 1등을 하고도 귀국자 자녀란 이유로 국제경기 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다 KBS 한민족방송(라디오)에서 탈북자와 한국 경제 상황 등을 듣고 부친 고향에 가면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계속 탈북을 시도했다. 2011년 서울∼부산 정도 거리인 평성에서 국경까지 가족을 데리고 가서 브로커를 통해 탈북했다.

-- 한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식당 일을 하고 회사에도 다니다가 북한대학원대학교를 알게 돼 축산을 포함한 경제 석·박사 학위를 땄다. 이후 2016년부터 비영리 NGO인 굿파머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굿파머스는 북한과 라오스,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우간다 등 지역에서 농업과 축산으로 어려운 농가의 소득 증진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농축산 분야 인재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 나는 북한 농업, 식량 문제 등을 연구하고 포럼이나 세미나를 통해 조언도 한다. 북송재일교포연구회(대표 최정훈)의 부대표로 재일교포 북송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도 지원하고 있다.

-- 북한 식량 사정은 어떤가.

▲ 농사가 잘돼도 연간 100만t 정도 식량이 부족한데 팬데믹으로 3년 동안 외부와 교류를 차단해 수입이 안 됐다. 공급 감소에 따른 식량 가격 급등으로 국가의 배급보다 시장에 더 의존하는 이들이 어려움에 부닥쳤다. 2019년 쌀이 1㎏당 4천원, 옥수수가 1천800∼1천900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쌀 6천∼7천원, 옥수수 3천원을 웃돌았다. 시장 위축으로 주민 소득도 줄어 식량을 구입하기 더 어려워졌다. 국경 쪽에서 아사자가 나오는 등 식량 부족에 따른 위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해 봄, 여름 농사가 작년보다 잘됐고 중국에서 10만t 정도 수입도 했지만, 원만한 상태는 아니다. 계란 생산이 잘될 때 연간 1인당 25개까지 공급됐으나 지금은 그것도 안 돼 단백질 공급도 열악한 상황이다.

-- 북한 식량난 해결 방안은.

▲ 인도적 지원은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된다. 배분 권한을 가진 노동당이 주요 부문에 먼저 보내기 때문에 군량미로 들어간다. 김정은이 최근 시찰한 북중기계연합기업소 같은 군수공장의 근로자들이 외부 지원 식량을 먼저 배급받아 먹은 뒤 무기 만드는 데 힘쓰게 된다.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은 1990년대 중후반 한국 등 국제사회에서 연간 50만∼100만t을 지원했는데 한해에 다 소비하고 다음 해 굶었다. 식량 생산은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중국처럼 농민에게 자율성을 보장하거나 최소한 집단농장의 경영에 대한 당정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 농민이 해마다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작물을 선택해 재배한 뒤 군량미와 자체 식량으로 쓰고 남은 곡식을 팔아 비료와 농약, 땔감, 의류 등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