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아들아, 된장물 한 사발만 있으면 나 이렇게 죽지 않을 듯한데"
  • 북민위
  • 2023-06-27 07: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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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만난 16세 북한 소년은 한없이 울었다. 팔다리는 뼈만 남았고,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부모님은 식량난으로 죽고, 두 명의 동생이 굶고 있기에 북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달러를 접어 비닐로 싼 뒤 소년의 항문에 넣어줬다. 죽지 말고 반드시 북한으로 되돌아가서 동생들을 먹이라고 했다. 중간에 돈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 아이는 우리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두만강을 건넜다. 우리는 혹시 그 아이가 총에 맞을까봐 노심초사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53)은 1993년부터 4년간은 이주노동자, 나머지 26년은 탈북민을 도왔다.

빈민가에서 자란 그는 사회 약자들과 고통을 같이하고자 했고, 그들을 구조하려 했으며,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탈북민을 돕는 과정에서 전쟁도 아닌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참상에 충격을 받았다.

지난 12일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탈북청소년 중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된장 한 사발, 달걀 하나가 없어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모두 주고는 자신들은 결국 굶어 죽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탈북한 아이들은 이 때문에 더욱 괴로워한다고 했다.

조 교장은 북한의 식량난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고, 방치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죽어가는 우리 동포들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1970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93년부터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탈북민 지원에 나섰다. 2003년에는 탈북청소년들의 야학인 '자유터학교'를 열었고, 2004년에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제안해 교감으로 일하다 지금은 여명학교 교장으로 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마을에서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때 노원마을은 빈민촌이었다. 하루 3끼 먹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철이 없었기에 왜 밥을 안 주느냐면서 엄마한테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충분히 밥을 먹지 못했던 나는 먹을 것을 지나치게 밝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별명이 돼지였다. 지금은 여명학교에서 '미스코리아 교장선생님'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당시 상계동 빈민촌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옆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우리 여섯 식구는 방 하나에 부엌이 달린 작은 집에서 살았다. 몸을 구부리고 자야 했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팠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월남전 상이용사였다. 금은세공, 개인택시, 트럭 운전, 옷걸이 장사 등 여러 사업을 하셨으나 실패하셨다. 평소에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아버지는 월남전 트라우마로 술을 마시면 난폭해져서 가족들을 괴롭혔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 공장일, 구멍가게, 아파트 청소 등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의 막걸릿집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어머니가 막걸리를 넉넉하게 드려서 그분이 단골이 됐다. 아주 어릴 때는 몰랐는데, 그분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유명한 시인인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상병 시인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갖고 계셨다.

-- 어머니가 정이 많은 분이었나.

▲ 어머니는 인정이 많았다. 걸인한테 밥을 줘도 찬밥이 아닌 새로 지은 뜨거운 밥을 주셨다. 그래서 걸인들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한테 "다른 집처럼 우리도 찬밥을 주면 되지, 왜 뜨거운 밥을 주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라도 대우받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했다.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할 때는 빵을 공급하는 아주머니,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국 아저씨 등에게 공짜로 밥을 주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느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이런 분들이 오셔서 가게를 봐줬다. 매일 벌어 먹고살아야 했던 우리 집은 그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일로 어머니로부터 정이 있고 따뜻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웠다.                                                    

-- 본인의 중고교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장난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도 선생님들한테 이쁨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숙직할 때는 자장면을 시켜서 드시는데,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는 자장면을 사주시는 분도 있었다.

-- 어머니 대신에 술을 판 적도 있다고 하던데.

▲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1주일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중동 건설 현장에 나가 계셨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장사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게 두려웠던 나는 어머니 허락 없이 막걸리를 팔았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다녀봤기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입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빈대떡은 살짝 데워서 내놓으면 됐다. 나는 퇴원한 어머니에게 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칭찬을 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그 가게를 곧바로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하셨다. 막걸리 장사가 자식들의 교육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 중학생 시절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하던데.

▲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그만두고 반짝이는 종이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 다녔다. 나도 중학교 방학 때에는 그 공장에서 일했다. 어머니와 한 조가 됐는데, 어머니가 좀 더 쉴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일했다. 지금 나의 양쪽 엄지손가락에는 지문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 공장 사장님은 어른보다 월급을 더 줄 테니 고등학교에 가지 말고 이 공장에서 일하라고 했다. 엄마는 그날로 공장을 그만두고, 아파트 청소 쪽으로 일을 바꿨다.

중국의 탈북민 북송 중지 시위를 벌이는 조명숙
                                    중국의 탈북민 북송 중지 시위를 벌이는 조명숙 

-- 사범대에 진학한 이유는.

▲ 나는 고3 시절에 뒤늦게 철이 들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사범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교사가 돼서 빈민촌 아이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대학생 시절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 돕기를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무엇인가.

▲ 한번은 우리 집에 전화가 왔다. 파키스탄 노동자가 전화를 잘못 건 것이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 친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친구는 산재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때부터 나는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시작했다.

-- 탈북자를 돕게 된 계기는.

▲ 외국인노동자 상담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탈북민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과 나는 상담센터 선후배였는데, 우리는 신혼여행도 중국으로 가서 탈북자들을 도왔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 곧바로 짐을 싸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나와 남편이 중국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7년과 1998년이었다.

-- 남편은 어떤 분인가.

▲ 현재 난민을 돕는 시민단체 '피난처'의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대 법대 79학번인 남편 이호택(64)은 대학교 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3학년 때에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손에 수전증이 오는 바람에 2차 논술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굳이 사법시험을 계속 볼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 남편과 나는 탈북민 지원, 난민지원 활동을 같이했다.

-- 남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나.

▲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얼굴도 모르는 선교사한테 신장을 하나 떼어줄 정도로 양심과 신념대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왜 신장을 떼어줬느냐고 물었더니 "그 선교사한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편은 최근에 '2023년 창의적인 서울법대인상'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 동문회가 주는 상이다.                                              

--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나.

▲ 두만강 등 국경지대에서 탈북민을 돕는 일을 했다. 두만강에는 중국으로 건너오다 숨진 북한 사람의 시체가 적지 않았다. 까마귀가 탈북민 시체를 뜯어먹는 것도 봤다. 까마귀가 잡식인 것을 그때 알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까마귀탕이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고객은 한국 관광객들이었다.

-- 백두산 기슭에서도 지원활동을 했나.

▲ 백두산에는 탈북민들이 숨어있곤 했다. 어떤 움막으로 그 지방의 조선족 동포 사학자가 나를 안내한 일이 있다. 움막 주변에 컵라면 빈 용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 사학자는 탈북 여성이 이곳에 머무르면, 중국 노총각들이 컵라면 용기에 국수를 담아 온다고 했다. 탈북 여성이 국수를 먹고 기운을 차리면, 돈을 조금 주고 성관계를 한다고 했다. 그 동포 사학자는 조선 민족이 전쟁이 아닌 시기에 이런 수치를 당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런 참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힘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겠다고 답변했다.

--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탈북민의 한국행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 1997년에 13명의 탈북민을 이끌고 중국-베트남 국경선을 넘어 하노이의 한국 대사관에 인계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군에 잡히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런데 우리 대사관에서 조사받은 후 베트남 외무성에서 조사받던 탈북민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베트남-중국 국경으로 보내지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과 베트남이 4차례에 걸쳐 탈북민들을 상대방 국경 안으로 넘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핑퐁난민사건'이다. 외환위기 등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국경지대로 갔다. 1년간의 노력 끝에 13명을 찾았고 11명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2명은 중국에 남겠다고 했다.

--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에 몇 명이 죽었나.

▲ 300만명가량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숨진 사람까지 포함한 것이다. 당시에 굶어 죽은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물론, 전염병으로 죽은 것도 영양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다.

-- '꽃제비'를 만난 일이 있나.

▲ 중국에 있을 때 16세가량의 북한 남자아이가 울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팔다리가 삐쩍 말랐고, 끔벅끔벅하는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얼굴은 못 먹어서 부었고, 세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옥수수를 싣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온 열차가 있었다. 그 안에 몰래 들어간 그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그 열차가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식량난으로 이미 죽었고, 동생 두 명이 북한에 있었다. 극심한 기아 상태였던 그 아이는 굶고 있는 동생들을 살리러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한참을 울었다.

-- 그 아이를 어떻게 했나.

▲ 일단 음식을 먹인 뒤 호주머니에 약간의 돈과 사탕, 엿 등을 넣었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먹을 게 아니다. 북한으로 가는 과정에서 빼앗길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빼앗길 것이 있으면 잡혔을 때 덜 맞는다. 우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달러를 작게 접어서 비닐에 싼 뒤 그 아이의 항문에 넣어줬다. 실로 연결해 잡아당겨 뺄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이 돈을 빼앗기지 말고 북한에 들어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숨죽여 지켜봤다. 다행히 그 아이는 총을 맞지 않고 무사히 건너갔다.

-- 된장 물 한 사발이 없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 여명학교 학생 중 한 명이 전한 자신의 이야기다.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생기면 먹지 않고 자식에게 줬다고 한다. 자식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오랫동안 굶은 아버지는 결국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에 탄 된장 한 사발이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아들은 그 된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 아들은 된장을 구해드리지 못한 데 대해 가슴을 치고 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수인성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양양 상태가 안 좋다 보니 전염병에 쉽게 걸린 것이다. 그 어머니는 달걀 하나만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어디에서도 달걀 하나를 구할 수 없었다.

--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왔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사람이 많았나.

▲ 지금은 중국-북한 국경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남-북한 휴전선처럼 철책이 이중삼중으로 처져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배고픈 사람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일이 많았다. 압록강과는 달리 두만강 폭은 좁은 곳이 20미터에 불과하고, 수심도 1미터 정도인 곳이 있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후다닥 뛰어가기도 했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 쪽으로 오면 인신매매단의 사주로 노인에게 성폭행당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이 노인에게 성폭행당하면 중국 농촌의 노총각에게 팔려나갈 때 그나마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계산으로 이런 짓을 한다고 한다.

-- 인신매매를 당하면 주로 농촌으로 팔려 가나.

▲ 중국 농촌에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들이 많다. 인신매매단이 농촌 총각들에게 넘겨 강제 결혼이 이뤄진다. 이 경우에 중국인 남편은 아내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못 나가게 감시하기도 한다. 아내가 도주하거나 공안에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유흥업 쪽으로 팔려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 어떤 탈북소녀는 벗은 몸의 모습을 인터넷으로 보여주고, 성매매도 하는 조직에 팔려 갔다가 도주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같이 일하던 탈북인 언니가 건물 5층에서 탈출하려다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는 목숨을 걸고 결행했다고 한다.

-- 엄마와 아이가 동시에 팔려 가는 경우가 있나.

▲ 엄마와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가 인신매매단에 붙잡히면 엄마는 농촌에, 아이는 자녀 없는 집에 각각 팔려 가기도 한다.

-- 남자 청소년은 노동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나.

▲ 남자아이가 노동 노예처럼 팔려 가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인이 자신을 짚 더미에 집어 던져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 이외의 다른 분야로 팔려 가는 경우가 있나.

▲ 인신매매단에 의해 장기 매매 조직에 팔려 간 청소년기 자매가 있었다. 신장 등 장기를 떼어 파는 조직이었는데, 간신히 탈출해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장기를 부분적으로 떼어가는지, 다른 장기도 떼어서 죽게 되는지를 몰라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중국에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고, 아버지는 식량난으로 돌아가셨다.

-- 지금도 탈북자들이 많은가,

▲ 많이 줄었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북-중 국경선 철책이 남북한 휴전선만큼이나 이중 삼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다 발각되면 사살될 수 있다.

-- 북한에 식량난이 다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 한동안 북한에서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식량 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에도 영국 BBC방송이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북한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자주 발견되는 곳은 기차역이다. 먹을 게 없어서 이동하려다 죽는 것이다, 배고픈 나머지 물을 많이 마셔서 배가 볼록 나온 상태로 죽기도 한다.

-- 북한의 식량 사정이 다시 나빠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북한이 핵 개발을 강행하면서 경제적으로 봉쇄됐다. 이어 코로나 사태로 국경이 완전히 닫혔다. 그전에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했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 식량 배급체계가 무너졌다.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장마당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중국에서 물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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