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소식] 다둥이 엄마 김보빈 "통일되면 北서 상조일 하고파"
  • 북민위
  • 2023-06-19 06: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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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빈씨
                                                                      김보빈씨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한국에서처럼 돌아가신 분들을 예쁘게 꾸며주는 상조 일을 하고 싶습니다."

탈북여성 김보빈(42)씨는 지난 9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숨을 거두신 어머니께 수의도 못 입힌 채 이불 천으로 감아서 장례를 치렀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 씨는 한국에서 건설 장 못 빼기와 과일 선별·포장, 식당일 등을 했다면서 "상조회사에서 시신을 보기 좋게 단장하는 일(염습)을 한 것이 가장 잘한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경기 양평군에서 디톡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인터뷰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9년 전 중국에서 인신매매와 강제 낙태를 당한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은 딸아이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강제 북송돼 성폭행당한 뒤 또다시 강제 낙태를 당했고 3년 옥살이까지 했다"며 "한국 여성 인권 수준의 50%만 북한에서 지켜지더라도 여성이 누군가의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그러나 "아픔이 나를 강하게 성장시켰고 한국 정착에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한국서 탈북민 남성과 만나 아이 4명을 키우고 있는 그는 다섯째를 임신한 다둥이 엄마다.

그는 탈북여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겪는 참혹한 인권 실상을 알리기 위해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다음은 문답.

-- 언제, 어떤 계기로 탈북했나.

▲ 함경북도 새별군(현 경원군)에 살았는데 22살이던 2003년 2월 정미소에서 돈을 벌게 해준다는 친구 숙모의 말을 믿고 중국에 갔다. 온성군 훈융에서 국경경비대 인솔을 받아 두만강을 건너 투먼시 양수진에 도착했는데, 조선족 부부가 랴오위안시 둥펑현의 농가에 (신부로) 팔아버렸다.

-- 중국 생활은 어땠나.

▲ 의사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보려고 가족이 보는 데서 자궁 검사를 했다. 집안일은 물론 논밭과 벽돌공장 일도 했다. 도망쳤다가 잡힌 뒤 3번 자살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임신을 해 2004년 5월 4일 출산 예정이었는데 공안 단속에 걸려 4월 26일 강제 낙태를 당했다. 당시 중국은 산아제한으로 '한 자녀 정책'을 폈는데 탈북자는 애를 낳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한 동네 살던 탈북 여성 10명 중 8명이 강제 낙태를 겪었다. 내 품에 안고 젖 한번 물리지 못한 채 죽은 아기를 보자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 중국에서는 아이를 못 낳았나.

▲ 다시 임신한 뒤 단속이 덜 한 더후이현으로 가서 2005년 7월 첫째 딸을 낳은 뒤 벌금 1만위안(약 182만원)을 내고 귀가했다. 시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아들과 바꿔오라고 해 고부갈등을 겪다가 아이를 데리고 옌볜 조선족자치주 옌지로 도망갔다. 거기서 백두산 가이드를 했는데 병원에서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자궁암 치료가 쉽다는 대구 출신 관광객 얘기를 듣고 딸을 보육시설에 맡긴 뒤 한국행을 시도했다. 그런데 2007년 7월 네이멍구 자치주에서 잡혔고 그해 10월 23일 강제 북송됐다.

-- 북송 후 가혹한 처벌을 받았나

▲ 온성군 보위부에서 3주일간 대못 박힌 각목으로 엄청나게 맞았다. 2007년 11월 15일 새별군 보안소로 이관된 후 한국행 기도가 아니라 일행을 잘못 만난 것이라는 내용의 조서를 12번 반복해 써서 가까스로 정치범수용소행을 면했다. 그러나 대기소에서 감찰과 부과장에게 성폭행당해 임신했다. 부과장은 내가 중국에서 아이를 배 왔다고 거짓말하며 2008년 1월 강제 낙태를 시킨 뒤 입을 막으려고 구류장(구치소)으로 보냈다. 3년 형기를 받고 회령의 전거리 교화소(교도소)로 갔다.

-- 여성 인권 유린이 그 정도로 심한가.

▲ 북한에는 여성 인권이 전혀 없다. 당 간부 눈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잠자리를 피할 수 없다. 성폭행당했다고 신고하면 어떻게든 보복당한다. 경찰부터 그렇게 하는데 어디에 하소연할 수 있나.

-- 교도소 실상을 말해 달라.

▲ 여러 옷을 뜯어서 한 벌로 만들고 머리도 귀 아래를 잘라버려 죄수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 걸을 때나 앉을 때나 항상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자를 캐거나 산에서 5m짜리 통나무를 끌어왔다. 옥수수를 씻지도 않은 채 가마에 찐 뒤 양배추 겉잎을 끓인 국과 같이 줬는데 배탈이나 변비에 시달렸다.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살아서 출소하는 사람보다 죽어서 나간 사람이 더 많았는데 나는 운 좋게 3년 동안 버텨냈다.

-- 출소 후 가족을 만났나.

▲ 집에 가서 아버지와 큰언니, 여동생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어머니와 셋째 언니는 중국 가기 전 폐결핵으로 사망해 가족 5명이 죽은 것이다. 둘째 언니와 남동생에게 중국에 가자고 했는데 감옥 갈까 봐 무서워해 2011년 4월 혼자 탈북했다. 중국 병원에 가서 검사받았는데 신기하게도 자궁암이 없어졌다고 했다. 보육시설에 맡긴 딸을 찾은 뒤 라오스·태국을 거쳐 2012년 6월 1일 한국에 입국했다. 2018년부터 언니와 동생을 탈북시키려다 실패했는데 동생은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한국에서 디톡스 센터는 어떻게 준비했나.

▲ 북한에서 감옥 생활하면서 몸이 매우 안 좋았다. 여기 와 자기장 온열 찜질과 족욕 등을 하면서 많이 회복됐다. 홍채와 양자 검사를 통해 신체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려주고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주는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이달부터 정식 운영을 시작했는데 예약이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 앞으로 계획은.

▲ 한국의 자유를 북한 친지에게 빨리 알려서 (그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썩고 병든 '남조선 괴뢰도당'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임을 전화 통화를 통해 알리고 싶다. 북한 주민이 세뇌를 잘 당하지 않게 되고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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