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제9화 수용소-요덕의 개요
  • 관리자
  • 2010-07-16 10: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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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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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9화 “수용소-요덕의 개요”를 들으시겠습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1950년대 중반에 생겨났다. 1947년에 지주, 친일파, 종교인 등 계급투쟁 대상들을 수용하는 마을 형태로 운영되다가 1958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마을의 탄광지역에 최초의 통제구역이 설치되었다.

한편 북한 당국자들은 1958년부터 실시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통해 전주민의 1/3인 320여 만 명을 ‘적대군중’으로 분류, 6천명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고 7만여 명을 산간벽지로 추방했다.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주민재등록사업’을 통해 주민들을 핵심, 동요, 적대 등 3계층 51개 부류로 구분하고 ‘위해하다고 지목되는 자’나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에 대한 비판자 등을 조사, 구금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들을 격리수용한 곳이 요덕의 정치범수용소였다.

“반혁명분자는 3대를 멸살 시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어린이들을 포함한 가족, 친척들까지 재판도 없이 수용된 곳이 다름 아닌 수용소다. 함경북도의 수성, 화성과 함경남도의 요덕, 그리고 평안남도의 덕천과 북창, 평북도 개천에 이러한 수용소들이 있는데 여기에 갇힌 사람들이 도합 20여만 명이나 된다.

초기에는 적대계층이 중심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로동당의 간부로 있다가 김일성 우상화와 김정일 후계자 강화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반당, 반혁명분자의 명목으로 수감자가 되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혁명의 파괴분자’로 낙인되기도 한다.

 


요덕수용소는 1969년 7월,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녹음강연에서 비롯되었다. “당내 간부들을 혁명화 할 데 대하여”라는 제하의 강연에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간부용 승용차를 부인들이 마음대로 타고 다닌다든가, 남편이 간부라고 여자들이 간부흉내를 내고 다닌다든가 하는 따위들이 자료적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한 지적을 받은 대상자들이 요덕으로 끌려왔고 당국자들은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인권유린의 생지옥 요덕 수용소를 만들어 냈다.

 


요덕은 북한 수용소의 대명사격이었다. 서쪽에 맹산군, 북쪽에 평남 대흥군, 동쪽은 함남 금야군, 남쪽으로는 함남 고원군의 탄광지대와 마주하고 있는 고립된 산악지역이다.

 


그곳에 용평리, 평전리, 구읍리의 일부, 그리고 입석리, 대숙리 등 5개 리를 합쳐 거대한 통제구역을 만들어 버렸다. 철조망 속 멀리 하늘과 맞닿아 굽이쳐 흘러가는 험준한 능성 밖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귀양지. 수십만 인민의 눈물이 흘러들어 풀과 곡식마저 핏빛으로 물드는 곳. 그곳이 바로 요덕 수용소였다.

 


요덕 수용소는 기록상으로는 조선인민경비대 2915군부대이지만 일명 15호 관리소라 불린다. 소장은 대좌 박창서로 경비는 사회안전성 제9국이 담당했다.

 


첫 입소가족은 대외문화연락위원회에 근무하던 박영민, 평양역전 백화점 층장 주희숙 부부 들이었다.

주변에 평균 해발 1700m에 이르는 산악이 요새처럼 버티고 서서 요덕수용소를 분지처럼 감싸고 있다. 북으로 1,724미터의 백산, 서쪽으로 1,517미터의 덕산과 1,724미터의 병풍산, 남으로 1,152미터의 매등산, 동으로 1,250미터의 채봉령이 에워싸 하늘만 빠끔히 뚫린 지역이기도 하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사방 흰 눈이 덮인 도가니처럼 보인다. 빽빽이 둘러친 험준한 산들은 탈출자를 막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수용소 남쪽 입구에서 북쪽 대숙리 초소까지 대략 35㎞, 동쪽 용평리로부터 서쪽 병풍산까지는 20㎞에 이른다.

 


우리 가족이 처음 간 곳은 공업대대와 관리위원회가 있는 구읍리였다. 1반부터 4반까지가 구읍리였고 5반부터는 입석리였으며 10작업반까지 분류되어 있었다. 구성은 가족단위, 독신자로 나뉘고 가족단위에는 장본인, 비본인으로 되어있다. 독신자인 경우는 모두 장본인이었는데, 그곳 수용소로 들어가는 원인이 된 사람을 일컷는 말이었다.

 


작업반별로 담화실이 있어 담당 보위원의 통제를 받았으며, 각 작업반에는 죄인으로 이루어진 작업반장과 통계원, 7명가량의 분조장과 1명의 축산분조장이 있었다.

 


경비와 감시는 이중 삼중으로 되어 있었다. 수용소를 둘러싼 철조망 너머로 2백 미터에 하나씩 포대경도 세워져 있었다. 그 바깥쪽으로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들이 박혀 있어 탈출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수감된 정치범들은 서로가 서로의 감시대상이고 물고 뜯는 관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도주가 불가능했다. 보위부는 이런 수법으로 수감자들을 통제했다.

 


또한 요덕수용소에는 용흥강의 상류인 입석천이 흘렀다. 워낙 산 속의 맑은 물이라 산천어, 열목어, 메기, 버들치 등 물고기가 많아 수용소 내 보위원들의 낚시터로도 이용된다. 하지만 수용자들이 낚시를 하다 적발되면 3개월 이상 특별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그 절망의 땅에 우리가족은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시련과 폭풍이 예고되는 땅에 삿자리도 제대로 깔지 못한 오두막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졌기에 이토록 가혹한 삶을 운명처럼 부둥켜 안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죄를 지었다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짐승도 얼굴 붉힐 이 고통의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음악)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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