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제4화 나의 오빠 김석천
  • 관리자
  • 2010-07-16 10: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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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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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4화 “나의 오빠 김석천”을 들으시겠습니다.

 


북조선 인민군의 모태는 평양학원이다. 김일성은 1945년 11월 17일 “현대적 정규군대를 창건하기 위해서는 간부가 필요하므로 학원을 창설하고 현대적 정규무력의 골간이 될 군사·정치 간부들을 키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준비 작업을 거쳐 평양학원은, 1946년 1월 3일, 평남 용강군 다미면 지울리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4개월의 단기 코스로 정치반과 군사 반을 둔 사실상의 사관학교로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후 평양학원 출신 군인들은 인민군의 핵심이 되었으며, 국내의 군과 정계를 장악하기 위한 김일성 계렬의 기반이 되었다. 초대 평양학원 원장은 김책이 맡았고, 김일성은 명예원장이 되었다. 또한 안길과 조정철, 주도일, 류한종, 최용진 등이 창설 맴버가 되었다.

 


평양시 철도경비대 대대장이었던 나의 오빠 김석천도 평양학원 1기생으로 들어갔다. 동기들로서는 김일성의 조카 김원주, 외삼촌 강용석, 할머니 리보익의 조카 김병렬을 비롯한 김일성의 일가친척들이 있었다. 개원 당시 모두 4개 반에 575명의 학생이 있었다. 나는 김책 원장과 대여섯 명이 찍은 졸업사진을 보며 오빠를 가려내기도 했다.

 


여1: 엄마. 여기 석천오빠 좀 봐. 와~우리 오빠 군복 입으니까 정말 멋지다.

여2: 그래. 멋지구 말구. 김책선생님도 계시구 조정철 선생도 계시구...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몽땅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이구나.

여1: 엄마, 그럼 석천 오빠두 항일빨찌산 참가자나? 그럼 우리두 백두산 줄기네?

여2: (웃음) 그래, 그래. 우리 가문도 석천이 덕에 백두산 줄기가 됐구나. 응? 하하하...

 


나의 오빠 김석천은 우리의 우상이었고 가장이었으며 영웅이었다. 일제강점기 석천 오빠는 중국혁명의 산지인 “태항산”으로 들어가 조선의용대 대원이 됐으며 이름 하여 공산혁명에 참가했다.

 


1935년 국제공산당 제7차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중국공산당은 8·1선언을 발표했다. ‘중국 소비에트 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정권을 통합하여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지의 반일의용군을 한 덩어리로 하는 전 중국적 항일련군으로 조직한다’는 항일구국선언이었다.

 


8·1선언에 따라 만주성위는 모든 반일무장대를 반일구국의 기치아래 단결시켜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련군을 조직했다. 제1로군 사령관에는 양정우가 임명되었고 제2로군 사령관에는 주보중이 임명되었다. 또한 3,6,9,11 군이 소속된 제3로군 사령관은 조상지가 맡게 되었다.

 


당시 동북인민혁명군에 가담하고 있던 조선인 대원들은 양정우가 사령관으로 있던 제1로군으로 많이 편입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서철·최현·오백룡·림춘추·안길·최용건·김책 등이 속해 있었다. 그후 이들은 일본군에 쫒겨 1941년, 쏘련으로 갔으며 쏘련군 극동사령부 88국제려단에 소속되었다. 려단장은 주보중이 맡았고 참모장은 최용건이었으며 대대급이던 제1 교도영 영장은 김일성이 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들은 신동북위원회라는 정치조직을 만든 동시에 조선공작단을 설치했다. 중공으로는 강건, 김광협이 들어갔고 조선으로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서철, 김일, 최현 등이 들어갔다. 최용건과 김광협 등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가 원산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1945년 9월 19일의 일이었다.

 


한편 나의 오빠 김석천은 주보중 부대에서 참모로 있다가 중국으로 건너온 강건의 부대에 편입해 작전참모를 맡게 되었고, 강건의 건유에 따라 조선으로 입북, 김일성 부대에 합세했던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평양학원 1기생이 되었던 김석천은 그후 평양보안간부훈련소 대위, 보위성 직속 3련대 작전참모로 발탁되었으며 인민군이 창설과 함께 소좌로 승진해 최현이 련대장으로 있던 보위성 직속 1련대 참모장이 되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나의 오빠였지만 역시 우리집 식구들의 운명은 길지 못했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 난지 얼마 안 되어 오빠의 련락병이었던 황흥룡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김석천은 어디가고 련락병인 자네 혼자서 나타났는가고 따지듯 하는 어머니의 눈길을 애써 피하면서 리홍광이 이야기 했다. “락동강 전투에서 그만...전사하셨습니다. 포항 월명동의 야산에 묻어 드렸구요”

 


그대로부터 며칠 후, 보위성의 직인이 찍힌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대좌 김석천. 3사단 참모장 1950년 8월 12일 전사”(음악)

 


세상에 단 하나 뿐이던 아들마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어머니는 주저앉고 말았다. 가난으로 첫 아이를 잃고 마적으로부터 네 아이가 죽임을 당했으며 시집간 딸마저 사고로 죽자 마지막 희망처럼 당신의 가슴속에 고이고이 간직했던 아들 김석천이었다.

 


그런 김석천이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 곁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음악)

 


그후 오빠는 북조선의 혁명열사로 로동당 기록보존소에 이름을 올렸고 내각의 공로자 명단에도 등록되었다.

 


우리 집은 렬사의 유가족으로 분류되어 김일성의 명절선물도 받군 했으며 북조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백두산 줄기를 붙잡은 가족”이 되어 버렸다.

오빠 김석천의 죽음과 맞바꾼 셈이었다.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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