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22-06-01 08: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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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3만 명이 넘었지만, 그중 변호사가 된 탈북민은 손에 꼽는다. 탈북민에게 변호사 시험은 넘어서지 못할 장벽에 가깝다. 첫 탈북민 변호사가 배출된 것도 불과 3년 전이다.
2019년 4월 대한민국 역사상 첫 탈북민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이영현 변호사. 1호 탈북민 변호사 탄생에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으나 변호사로서 실무를 익히기도 전에 호들갑스럽게 포부만 늘어놓고 싶지 않아 정중히 거절했단다.
떠들썩한 축하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3년간 묵묵히 실력을 쌓아온 그를 지난달 말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1호 탈북민 변호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닐 텐데, 실제 변호사로 일할 때 도움이 됐는지 궁금하다. 혹은 이로 인해 업무 영역이 제한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 탈북민 변호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제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의뢰인이 남한사회의 물정을 모르는 것 아니냐며 신뢰가 안 간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의뢰인도 결국에는 일 처리 과정을 보고 제게 사건을 맡겼고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실제로 일하다 보니 한국 사회가 탈북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크다는 걸 많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제 정체성을 숨기거나 부정할 생각은 없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출신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날이 올거라 믿으며 일했다. 사실 제게 북한은 운명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과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고 싶어 변호사가 되기로 했고, 그 소명 때문에 어려운 과정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전에 만난 한 탈북청년은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탈북민은 한국에서 변호사가 될 수 없다고 해 꿈을 포기했다고 했다.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뭔지, 그리고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는지 묻고 싶다.
“19살에 대한민국에 입국해서 탈북민 대안학교를 다녔다. 입국했을 때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까막눈에 가까웠다. 그때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면서 진로 상담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데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한국에 온 탈북민들을 위한 북한인권 변호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처음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만류했다. 한국 사람도 힘든데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냐고 했다.”
–탈북민 변호사가 당시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세상을 모르고 겁 없이 당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됐다. 한반도 내가 못 이룰 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고시 패스하겠다고 대학교 2학년 때 삭발하고 산에 올라갔다. 그런데 혼자서는 법서를 읽기도 힘들었다. 한자어가 너무 많고 난해해서 독해도 안 됐고, 이해가 안 되니 암기도 안 됐다. 두 달 만에 사시를 포기하고 로스쿨에 가야겠다 싶었다. 로스쿨 졸업 후 다섯 번의 변호사 시험 기회가 주어졌고, 다섯 번째에 합격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을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사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죽을 고비도 넘기며 어렵게 한국에 왔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몸으로 경험한 세대다. 어릴 때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다. 배고파서 중국까지 왔는데 그 길이 고향을 떠나는 길이 될 줄도 몰랐다. 다행히 부모님 같은 미국 선교사님을 만나서 그분들의 도움으로 한국까지 왔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몽골 사막을 건너왔는데 북송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죽는 것보다 북송이 더 무서웠다. 도저히 한국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 몽골 사막에서 유언을 남기기도 했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 참 많이 힘들었지만 죽음도 넘겼는데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나 인도하신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명이 저를 견인하는 힘이 됐다.”
-변호사가 된 지 만 3년이 됐다. 지금까지 변호사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수임료를 떠나서 신뢰를 얻고 도움을 드렸던 경험에 보람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한번은 임차인과 임대인 간 분쟁이 있었는데 두 분 다 70대 어르신이셨다. 임차인이 소송까지 진행하겠다고 하셨는데 양쪽을 각각 면담하고 조율해서 합의할 수 있게 도와드렸다. 갈등이 봉합된 뒤에 두 분 모두 연락이 왔는데, 살면서 많은 변호사를 봤는데 당신 같은 변호사는 처음이라며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이제는 변호사 사무실(법무법인 세창)을 개업했기 때문에 사무실 운영도 해야 하고 직원들 월급도 주려면 영리 활동도 중요하다. 하지만 사건 의뢰가 들어오면 내 가족 일처럼 나선다. 의뢰자와 그런 신뢰들이 쌓여서 좋은 결과도 도출되고 보람도 느끼게 된다고 믿는다.”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재단에서 사무총장직도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대한변협 인권재단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대한변협 인권재단은 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존중받을 수 있는 인권선진국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인권사업을 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공동으로 북한인권백서를 발간하고 북한 민주화와 주민들의 알권리를 위한 세미나, 북한인권수기 공모사업, 북한인권 활동가 후원 사업 등을 하고 있다.”
–탈북민 변호사는 여전히 드물다. 변호사가 되고 싶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는 탈북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부에 대한 기본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 왔고 학업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로스쿨에서도 과정을 따라가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지만, 결국 하면 되더라. 현실의 벽이 높아 보여도 올라야만 넘을 수 있다. 나도 했으니 누구든지 하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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