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소식]
‘묘향산 한의원’ 원장 “대북방송 듣고 한국행 결심”
- 관리자
- 2010-06-23 10: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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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들까지 대북방송을 청취해, 군인들 심리적 작용 커]
북한의 DMZ구역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이 대북방송을 통해 남한사회에 대한 동경심을 나날이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MZ구역에서 軍복무를 하던 중 1997년 5월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입국한 경기도 양주시 ‘묘향산 한의원’ 박세현(35)원장이 18일 본 방송국 기자와 대북방송이 북한군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기자: 북한 어느 곳에서 軍복무를 하셨는가요?
박 원장: 예, 1992년 봄부터 개성시 개풍군 조광리에 위치한 2군단의 최전연에서 군사복무를 시작했어요. 낮에는 강화도가 보였고, 밤에는 소리를 치면 들릴 정도로 저희 부대와 남한 군인들의 초소 사이 거리는 불과 870m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묘향산 한의원’ 박세현 원장. ⓒ자유북한방송>
기자: 전연부대이면 식생활 조건도 다른 부대보다 낫지 않나요?
박 원장: 당시 군인들의 식생활은 말이 아니었어요. 돌도 삭일 나이에 부대 식량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하루 한 끼는 죽을 먹었고 상시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소대에는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이 속속 늘어났어요.
여단에서는 중대별로 허약한 군인들을 한 개 소대 가량 모집해 산에서 나물을 전문으로 캐는 ‘부업반’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이 뜯어온 산나물을 다른 소대에 나눠 줘 풀죽을 쑤어 먹게 했는데 도시에서 자란 애들은 산나물을 몰라 독풀을 뜯어 그걸 먹은 군인들이 소동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우(위)에선 고기 공급을 못하니 중대별로 토끼나 염소를 자체로 길러 먹으라고 하지만 그것도 장교들이 다 먹고 병사들을 1년에 한두 번 정도 맛볼 수 있어요.
기자: 대북방송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박 원장: 밤에 근무를 나가면 남한에서 송출하는 대북방송이 가까이 들렸습니다. 11년 동안을 적이라고 교육받은 저로서는 24시간 쉴 새 없이 나오는 남한방송이 ‘우리 사회주의’를 고립 압살하려는 모략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대북방송을 들을수록 점점 남한사회의 진실을 새롭게 알고 동경하게 되었고, 표창휴가로 집에 간 기회를 이용해 1997년 5월 마침내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대북방송을 듣는 병사들은 남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박 원장: 대부분의 병사들이 라디오를 듣고 있지만 후과(뒤끝)가 두려워 서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친한 친구들 사이에는 속마음을 털어놓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대북방송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기구를 통해 떨어진 삐라, 라디오, 물건을 보고서도 남조선이 북한보다 못사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사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한국에서 보낸 기구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었나요?
박 원장: 반도체 라디오와 비누, 담배 등 여러가지였어요. 상관들은 ‘기구로 떨어진 물건을 먹거나 사용하면 천천히 죽는다’며 발견 시 모두 매몰하라고 지시하지만 병사들은 몰래 다 사용했습니다.
당시 軍당국은 명령 007호를 내려 군인들이 머리를 빡빡 깎게 했는데 부대에서 내주는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불쾌한 냄새가 살에까지 배어 오래갔어요. 하지만 남한 비누를 쓰면 때도 잘 씻기고 향수를 치지 않아도 몸에서 향내가 오래 가 군인들이 선호했습니다.
저도 처음 주었을 때에는 혹시나 해서 사용하기를 꺼려했는데 다른 병사들이 모두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과자나 사탕을 보는 족족 모두 주워 먹었어요. 남한에서 기구로 보낸 물건을 먹거나 사용하고 죽은 군인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기자: 한국에서 보낸 라디오를 주워들었다는데 그것이 軍복무를 하며 가능한가요? 통제가 심할 텐데요.
박 원장: 물론 통제가 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라디오를 주워 물이 들어가지 않게 비닐로 두세 겹 싸서 산에 감춰두고 몰래 들어요.
한 번은 함경북도 새별군이 고향인 소대 부분대장이 라디오를 듣다가 저에게 들킨 적이 있었습니다. 軍복무 7년째인 그는 성격이 괴벽해 상관의 통제도 안 되어 근무도 잘 나가지 않았어요. 어느 날 병실에서 라디오를 듣는 그와 마주쳤는데 너무도 당황해 굳어져 라디오를 끌 생각도 못했고 윗주머니에서는 남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냥 흘러나왔습니다. 한동안 나를 보다가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오금을 박고는 라디오를 들어보라며 ‘우리가 학습, 강연회에서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어요.
기자: 장교들도 남한 라디오를 듣는가요?
박 원장: 라디오를 듣는 건 직접 보지 못했지만 우리 여단의 여단장 처가 남한방송을 듣다가 여단 정치위원의 처에게 들켜 철직되어 대낮에도 멧돼지들이 땅을 구루며 다닌다는 양강도 산골로 추방되어간 적이 있습니다. 고급장교의 처가 한국 라디오를 듣는 정도이니 들키지 않고 듣는 장교들은 많다고 생각해요.
기자: 북한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상상한 것과 실제로 남한에 와서 본 것이 다른 점이 있나요?
박 원장: 현역군인으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세계로 극적인 전환을 한 저로서는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북한에서 라디오를 듣고 한국에 대한 환상을 크게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20년을 한국에 대해 나쁜 이미지만을 세뇌받은 것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한사회에 새롭게 정착을 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어요.
중국집 음식 배달부터 건설장 노가다(막일)까지 못해본 일이 없었지요. 그 과정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북한에서 배운 것은 역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거짓말인데 제대로 다시 배우겠다고, 그것도 남한사람들 조차 힘들어 하는 의학공부를 하겠다고 한거예요. 주변의 친구들은 ‘드디어 네가 미쳤다’며 돈을 벌어 장가를 갈 생각만 하라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지대 한의학과에서 6년을 남들이 하나를 하면 열을하며 악착같이 공부를 했고 졸업 후 국가자격증고시에 합격했어요.
기자: ‘묘향산 한의원’은 언제 설립했나요? 혹시 묘향산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박 원장: 한의원은 작년 4월 은행에서 2억을 대출받아 설립했어요. 처음 ‘묘향산 한의원’이라는 간판을 접한 사람들은 ‘왜 묘향산인가’고 물었고 제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도저히 믿지 않았습니다. ‘남한사람들도 어려운데 어떻게 북한에서 온 사람이 병원을 차릴 수 있는가. 혹시 아버님 고향이 북한인가’고 반문까지 했습니다.
제가 굳이 ‘묘향산 한의원’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고향이 북한이고 또 한시도 잊은적이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지요. 물론 김정일 독재정권에 대한 환멸은 골수에 사무쳤지만 제가 나서 자란 경성 땅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처음엔 제 고향 경성과 가까운 ‘칠보산 한의원’이라고 지을까 했는데 칠보산보다는 남한사람들도 다 아는 묘향산으로 지었습니다.
기자: ‘묘향산 한의원’을 찾는 환자가 많은가요?
박 원장: 최근에는 양주시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져 환자가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치료가 한방이라 어르신들이 많이 찾아오지요. 허준의 동의보감에 기초한 한방이라 양방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큽니다.
기자: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에 가실건가요?
박 원장: 물론이죠. 경성에는 약효가 뛰어난 온천이 있고 공기도 좋습니다. 저는 통일이 된다면 제일 먼저 고향으로 가서 온천을 이용한 한의원을 크게 세울 결심이예요. 그래서 말로만 무상치료제라고 하는 북한의 보건실태, 간부들만 치료를 받는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겁니다.
김은호 기자 kyz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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