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수용소의 노래" 제5화
  • 관리자
  • 2010-07-16 10:37:05
  • 조회수 : 1,690
설화: 남북은 5천의 역사를 함께 살아온 한민족 이다. 어쩌다 짐승만도 못한 독재자를 만나서 세계 제일 빈곤국가로 전락한 동토의 땅을, 인간이 살수 없는 지옥의 땅을 우리들이 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구하겠는가?

라디오 방송극 “ 수용소의 노래 ”

원작 강철환, 각색 김기혁, 감독 송동렬, 오늘은 그 다섯번째 시간입니다.

설화: 고명옥 할머니의 손자인 덕원 이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 올 때 덕원이네는 어머니도 함께 왔다. 나는 어머니가 있는 덕원이를 몹시 부러워했다. 하지만 덕원이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일본여자들은 조선여자들에 비해서 생활력이 무척 약했다. 그래서 수용소에 들어온 일본 여자들은 대부분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렸다. 덕원이 엄마도 일본여자였다.

어떤 일본여자는 1년도 못되어서 이질에 걸려 죽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질에 걸려도 죽지 않는데 일본사람들은 이질에 걸렸다 하면 곧 죽어 버렸다.

일본사람들은 산나물을 먹을 줄 몰랐고 양식을 조금씩 아끼고 쪼개서 먹을 줄 몰랐다. “이러다간 남편을 따라 온 일본인 처는 다 죽고 말겠구나 남의나라에 와서 죽을 고생만 하다가 개돼지처럼 죽으니 불쌍도 하지” 할머니는 일본인 처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가슴 아파 하셨다.

유난히 일본여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할머니에게 미호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미호: “ 할머니는 왜 일본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해 우리선생님이 그러는데 일본에서 온 쪽바리는 반동분자래 근데 할머니는 일본사람하고 친하잖아”

설화: 미호만 해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몰랐다. 교원들이 일본 놈 쪽빠리 새끼 하면 으레 그렇게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할머니의 경우 일본이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나이인 13살에 일본에 건너가서 쉰이 넘도록 살았으니 조선말보다도 일본말을 더 잘했다. 집에서도 일본말만 썼다.

아버지는 조선이름대신 “도시짱”이라고 불러졌었다. 엄마와 아버지도 일본말로 대화를 하였다. 할머니는 고향을 찾아온다고 북송선을 타셨지만 북조선은 결코 할머니의 고향이 될 수 없었다.

원주민 보다는 교포나 일본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해서 더 친하게 지냈다. 귀국자 마을의 일본인 처들은 육체노동이나 굶주림보다도 바깥세상과 연락이 두절된 것을 더 못 견뎌 했다고 한다.

가족 친지들과 하루아침에 소식이 끊겨 생사를 모르는 것은 그들에게는 분명이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보면 귀국자집의 아이들이 비교적 말을 잘 듣는 편이다. 그런데도 교원들은 말끝마다 “ 반쪽바리 새끼”라며 욕을 해댔다. 특히 엄마가 일본여자인 아이들은 이욕을 먹으면 주눅이 들어 말도 못하였다. 어쩌다 서툰 조선말을 하면 교원이란 어른이 조롱을 하며 반쪽바리가 어떻고 혁명정신이 어떻다는 바람에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덕원이 할머니의 상경을 서시고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집에 돌아 오시였다. 할머니는 밤을 새고 들어온 아버지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발아보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 “이제야 오냐, 온밤을 새워서 어떻게 일을 하겠냐?”

아버지: “ 육체가 힘든건 괞찮아요 . 마음이 아픈 것이 더 힘들어요.”

설화: 아버지는 밤을 꼬박 새운 피곤함 보다 약 한 첩 못써보고 불쌍히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신 것 같았다.

할머니: “ 이러다간 공화국에 들어온 우리 귀국자들이 모두 몰살 을 당하겠구나. 본국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기나 알갔니. 그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한덕수 그놈이 나쁜 놈 이다. 그놈은 공화국이 이런 세상이라는걸 다 알면서도 우리를 속여서 이곳에 보냈으니 천벌받을놈”

설화: 할머니는 귀국자들을 속여 북한으로 들여보낸 조총련 위원장 한덕수를 두고두고 미워 하셨다.

삼촌: “2차 대전때 히틀러가 유태인 대학살을 시킨 것과 같은 거지요”

할머니: “ 공산주의라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인데 ... 이건 아니야 아니구 말구”

설화: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공산주의라는 것에 미련이 있어 보였다.

할머니: "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한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안 그러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오늘의 죄악을 세상에 고발해야해,“

할머니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같은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시곤 했다.

~음악~
 
안녕하십니까? 강철환입니다. 저의수기를 통해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전해 드리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행운아였다고 생각 합니다. 일반사회에서도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다는 요즘 수용소의 사정은 과연 어떨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데요, 굳게 잠긴 북조선의 빗장이 하루빨리 풀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