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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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7화 “수용소의 상징-요덕으로 가다”를 들으시겠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보위부 예심과에 련행되었던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두 달여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보위부 간부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남: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 나 국가보위부에서 일하는 최준경이라고 하오. 이쪽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고. 에~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무가 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러 가지 발언들을 함으로서 당과 국가에 엄중한 잘못을 범했다는 거요.
여1: 동무가 한 발언들이 외부로 새여 나갔다고 볼 때 후과가 얼마나 엄중한지는 동무가 잘 알거예요.
남: 두말할 것 없고, 이 시각 이후 당에서 취하는 조치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말 알아들었습니까?
여2: 당에서 취하는 조치라니요? 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남: 이사람 이거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만. 이보! 김영순이! 당신 정말 밑구멍이 쑥 빠지도록 혼쌀이 나야 정신 차리가서?! (효과 음악)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저들이 나를 처벌하려고 하고, 나는 저들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처벌을...무슨 죄명으로 나에게 내리려 하는지 마음 한가운데가 저리도록 궁금하기만 했다.
남: 지금 이 순간부터 친구는 물론, 알고 지내던 어떤 간부도 만나서는 안됩니다. 오직 담당 지도원이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알겠습니까?
여2: 예...
고양이 앞에선 쥐 같은 신세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짧게 대답한 후 창백한 얼굴로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남: 집행하시오!
담당 이호춘 중좌에게 그 짧은 한마디를 내 뱉은 다섯 명의 사람들은 들어 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나가 버렸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난 다음날 담당 이호춘 중좌가 옷을 가져다주면서 당증을 내어 놓으라고 했다. 손수건만한 붉은 천에 싸고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다시 납작한 양철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당원증을 꺼내 주었다.
규약에 의하면 당원들과 세포조직의 결정에 따라 입당과 출당이 처리 되지만 나는 당증을 압수당하면서 자연 출당자가 되고 말았다.
정신을 못 차린 채 이호춘 중좌를 따라 아파트를 나섰다. 건물을 나서며 슬쩍 곁눈질 해 보니 보통강 구역 대타령동 어디 쯤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름 하여 312호로 보위부 비밀초대소라는 곳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아빠트로 위장돼 있었지만 속은 지옥에나 대비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건물 앞에는 69형 지프차가 시동을 건채 대기하고 있었다. 11시쯤 집에 도착해 보니 얼굴이 반쪽이 된 어머니가 젖먹이 손자를 안고 서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서 소식도 없이 사람의 속을 그렇게 태우는가고 나무라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며 울어 버렸다. 그러는 나를 붙잡고 함께 울어버리는 어머니를 향해 이호춘 중좌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 했다.
남2: 영순동무는 당과 조국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조를 했으니 집안 식구들도 이제는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음악)
이를 데 없이 암담한 분위기가 집안에 맴 돌았다. 한참 후, 인부 다섯 명이 와서 이삿짐을 쌌고 나는 서재에서 세계문학선집과 백과사전 등을 꾸레미 로 묶기 시작했다. 이호춘 중좌가 나서서 어떤 꾸레미들은 통째로 몰수하기도 했고 어떤 짐은 가져갈 수 없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동원된 인부들은 숙련된 일솜씨로 보따리며 부엌세간 등을 자동차에 싣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혁명유가족이라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이들이 줄줄이 딸린 나를 생각해 함께 가기로 결정 했다.
아래층에 사는 항일련군 출신 조정철의 부인이 사과를 한 소래 가져왔지만 군복입은 사람의 감시하에 이사짐을 꾸리는 우리 식구들을 보더니 사과만 내려놓고 황급히 돌아갔다.
남: 자,자, 이거 뭐 이렇게 꾸물대는 겁니까.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음악)
칠순이 넘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이 네 명이었다. 큰딸 열 살, 둘째 여덟 살, 셋째 여섯 살, 갓 돌이 지난 두 살짜리 막내와 나, 이렇게 일곱 식구가 트럭에 올랐다.
그렇게 정든 고장을 떠나는 우리 식구들을 보며 사람들은 수군 거렸다. 그러는 이웃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쫓기듯 하자니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가족을 실은 자동차는 평양역에 당도했고, 우리는 다시 렬차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어릴 때 부모님들을 따라 중국에서 이사온 후, 25년 동안을 고스란히 살아온 평양. 평양만은 떠나게 되지 않기를 무척이나 바랬지만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고, 나락으로 처박히듯 미지의 세계로 돌진하고 있었다.
무너진 가슴으로 차창 밖만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첫 목적지인 함경남도 금야군까지 그렇게 달렸고, 저녁 여섯시 무렵, 금야역에서 내려 려관으로 들어갔다.
가족 모두 난생 처음 겪는 일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 침묵만 지킬 뿐... 애들도 철이 든 어른마냥 어찌나 고분고분한지 한편 기특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변소엘 가겠다고 했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가고 보고를 했다. 마구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나 겁을 주고 사람을 윽박질렀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짹소리 한 마디 못하고 마냥 끌려갈 수 있단 말인가...(음악)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