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숙청당한 서울대 교수들
- 관리자
- 2010-05-10 16:09:39
- 조회수 : 4,610
[반동적인 부르죠아 심리학 가르친다고 숙청]
김일성 일가의 개인 과외교사를 지낸바 있는 김현식(75·전 평양사범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씨가 탈북 15년만에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김영사)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한국 “통일정책연구소”연구원으로 있다가 4년 전 미국으로 간 김씨는 1992년 남한으로 온 대표적 탈북 인텔리이다. 1970년대 초 실시된 북한 중등교육(10년제)의 기반을 닦는데 기여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미국 예일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자서전에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탈북과정,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처음 만나던 일과 평양 로열패밀리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상세하게 적혀져 있다.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 자신의 글이 본 방송을 통해 낭독된다는 사실에 무한히 고무된다고 밝힌 김현식 교수의 글 중, “숙청당한 서울대 교수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숙청당한 서울대 교수들
우리 대학에는 1950년 전쟁 때 서울대에서 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김택원, 리준하, 리본녕 교수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김일성대학에 있었는데 김일성대 교육학부가 평양사범대학으로 이관되면서 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김택원 과 리준하 교수는 교육학을 가르쳤고 리본녕 교수는 심리학을 가르쳤는데 모두들 실력이 뛰어나고 인품이 좋아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다.
1960년에 나는 리준하 교수와 함께 졸업반 학생들의 교육 실습지도를 위해 개성고급중학교에 가서 한 달을 같이 지냈다. 그곳에서 하루는 판문점 군사분계선 근처에 있는 중학교를 참관하게 되었다. 학교 앞에는 군사분계선을 가르는 철조망이 놓여 있었다. 학교 참관이 끝나자 교장이 우리를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저기 서울이 보이시지요.” 교장의 말에 리준하 교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아, 저기가 삼각산인가 봐요. 그래 맞아, 분명 삼각산이야. 삼각산 기슭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리 교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도 다 변했겠지요? 제발 살아만 있었으면……오, 하나님…….”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얼떨결에 ‘하나님’이란 말까지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더더욱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던 사회였다.
그날, 리준하 교수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을 비판하기만 했다. 그렇게 후회할 걸 오기는 왜 왔을까, 오려거든 가족도 모두 데리고 올 것이지 혼자 무얼 바라고 넘어 왔을까 하며 가족이 그리워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아무 것도 장담하지 말라더니 지금에 와서 나는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 리준하 교수를 생각해 보곤 한다. 왜 나는 그를 위로하지 못했던가. 삼각산의 그림자만 보고도 가족이 사는 집이 그리워 울먹거리던 그의 처지가 수십 년이 지나 새삼스레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서울대 출신의 교수들은 그 처치가 어려워 졌다. 김일성 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모든 교육내용이 그에 맞추어 변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온 교수들은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변화하지를 못했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이나 모두 김일성 의 사상이론에 맞춰 새로운 틀을 짜야 했는데 그들 세 사람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이 김일성 이 요구하는 것을 더 잘 알아들어서 결국 교육학 교수 두 사람이 먼저 학교를 떠나야 했다.
김택원 교수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실직한 채 보조금도 없이 어렵게 살아야 했다. 리준하 교수는 아직 년로보장 나이가 되지 않아 대학을 그만 두고 일반 직장으로 옮겨가 막노동을 했다. 리준하 교수의 제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가 공장 지배인으로 일하는 평양완구 공장에 연구사로 데려가기도 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리준하 교수는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집에 살아서 서로 가까이 지냈었다. 그는 북한에 와서 개성 출신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리준하 교수가 완구공장에서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의 가족들도 자취를 감췄다. 그 당시 얻은 아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심리학을 가르치던 리본녕 교수는 김일성 심리학으로 바꾸어 가르치라는 당의 지시를 지키지 못해 수도 없이 강의 중단을 당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학생들에게 반동적인 부르주아 심리학을 강의한다는 죄목으로 처단 당해서 쥐도 새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난 사람이 비단 남한에서 올라온 사람들만은 아니다. 북한 출신이라고 해도 계급 토대가 나쁘면 모조리 쫓아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세계문학을 가르치던 한경수 교수도 하룻밤 새 사라졌다. 그 부인과 아이도 함께 사라져 집이 텅 비어 있었다. 함흥 출신이라 나와는 고향이 같아 아주 친하게 지냈었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아버지가 함흥의 대지주였기 때문에 숙청을 당했다고 한다.
한때 평양에서 이름을 날린 작가로 한설야가 있다. 그의 두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우리 대학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로어를 가르쳤는데 그들도 한설야가 숙청당하자마자 두 사람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 일본의 릿꼬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고대 문학을 가르치던 류창선 교수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이 그의 열정적인 강의에 그대로 정신이 빨려들어가게 될 만큼 훌륭한 교수였다. 그도 아버지가 악질 목사였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또 서울에서 온 유명한 어학자 정렬모 교수도 감쪽같이 사라졌고 평론가인 안함광 교수도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유북한방송 [2007-06-27]
김일성 일가의 개인 과외교사를 지낸바 있는 김현식(75·전 평양사범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씨가 탈북 15년만에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김영사)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한국 “통일정책연구소”연구원으로 있다가 4년 전 미국으로 간 김씨는 1992년 남한으로 온 대표적 탈북 인텔리이다. 1970년대 초 실시된 북한 중등교육(10년제)의 기반을 닦는데 기여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미국 예일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자서전에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탈북과정,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처음 만나던 일과 평양 로열패밀리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상세하게 적혀져 있다.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 자신의 글이 본 방송을 통해 낭독된다는 사실에 무한히 고무된다고 밝힌 김현식 교수의 글 중, “숙청당한 서울대 교수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숙청당한 서울대 교수들
우리 대학에는 1950년 전쟁 때 서울대에서 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김택원, 리준하, 리본녕 교수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김일성대학에 있었는데 김일성대 교육학부가 평양사범대학으로 이관되면서 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김택원 과 리준하 교수는 교육학을 가르쳤고 리본녕 교수는 심리학을 가르쳤는데 모두들 실력이 뛰어나고 인품이 좋아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다.
1960년에 나는 리준하 교수와 함께 졸업반 학생들의 교육 실습지도를 위해 개성고급중학교에 가서 한 달을 같이 지냈다. 그곳에서 하루는 판문점 군사분계선 근처에 있는 중학교를 참관하게 되었다. 학교 앞에는 군사분계선을 가르는 철조망이 놓여 있었다. 학교 참관이 끝나자 교장이 우리를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저기 서울이 보이시지요.” 교장의 말에 리준하 교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아, 저기가 삼각산인가 봐요. 그래 맞아, 분명 삼각산이야. 삼각산 기슭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리 교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도 다 변했겠지요? 제발 살아만 있었으면……오, 하나님…….”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얼떨결에 ‘하나님’이란 말까지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더더욱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던 사회였다.
그날, 리준하 교수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을 비판하기만 했다. 그렇게 후회할 걸 오기는 왜 왔을까, 오려거든 가족도 모두 데리고 올 것이지 혼자 무얼 바라고 넘어 왔을까 하며 가족이 그리워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아무 것도 장담하지 말라더니 지금에 와서 나는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 리준하 교수를 생각해 보곤 한다. 왜 나는 그를 위로하지 못했던가. 삼각산의 그림자만 보고도 가족이 사는 집이 그리워 울먹거리던 그의 처지가 수십 년이 지나 새삼스레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서울대 출신의 교수들은 그 처치가 어려워 졌다. 김일성 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모든 교육내용이 그에 맞추어 변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온 교수들은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변화하지를 못했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이나 모두 김일성 의 사상이론에 맞춰 새로운 틀을 짜야 했는데 그들 세 사람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이 김일성 이 요구하는 것을 더 잘 알아들어서 결국 교육학 교수 두 사람이 먼저 학교를 떠나야 했다.
김택원 교수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실직한 채 보조금도 없이 어렵게 살아야 했다. 리준하 교수는 아직 년로보장 나이가 되지 않아 대학을 그만 두고 일반 직장으로 옮겨가 막노동을 했다. 리준하 교수의 제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가 공장 지배인으로 일하는 평양완구 공장에 연구사로 데려가기도 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리준하 교수는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집에 살아서 서로 가까이 지냈었다. 그는 북한에 와서 개성 출신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리준하 교수가 완구공장에서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의 가족들도 자취를 감췄다. 그 당시 얻은 아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심리학을 가르치던 리본녕 교수는 김일성 심리학으로 바꾸어 가르치라는 당의 지시를 지키지 못해 수도 없이 강의 중단을 당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학생들에게 반동적인 부르주아 심리학을 강의한다는 죄목으로 처단 당해서 쥐도 새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난 사람이 비단 남한에서 올라온 사람들만은 아니다. 북한 출신이라고 해도 계급 토대가 나쁘면 모조리 쫓아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세계문학을 가르치던 한경수 교수도 하룻밤 새 사라졌다. 그 부인과 아이도 함께 사라져 집이 텅 비어 있었다. 함흥 출신이라 나와는 고향이 같아 아주 친하게 지냈었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아버지가 함흥의 대지주였기 때문에 숙청을 당했다고 한다.
한때 평양에서 이름을 날린 작가로 한설야가 있다. 그의 두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우리 대학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로어를 가르쳤는데 그들도 한설야가 숙청당하자마자 두 사람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 일본의 릿꼬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고대 문학을 가르치던 류창선 교수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이 그의 열정적인 강의에 그대로 정신이 빨려들어가게 될 만큼 훌륭한 교수였다. 그도 아버지가 악질 목사였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또 서울에서 온 유명한 어학자 정렬모 교수도 감쪽같이 사라졌고 평론가인 안함광 교수도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유북한방송 [200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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