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제6화 성혜림의 재혼, 그리고 사라진 남편
  • 관리자
  • 2010-07-16 10: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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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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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6화 “성혜림의 재혼, 그리고 사라진 남편”을 들으시겠습니다.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으면서 제대명령서를 받은 나는 평양시 중심가에 자리 잡은 려행자 상점에 배치 받게 되었다. 수회공연도 없고, 출장도 없는지라 가정생활에 충실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주어졌다.

 


외국인들이나 당 간부들, 외국려행을 나가게 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상점인지라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게 됐고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되군 했다.

 


살림집도 항일빨찌산 참가자 가족이란 미명하에 평양시 중심구역에 마련되었는데 바로 윗집에 4.25 인민군영화촬영소 소장 차계룡이 살고 있었다. 예술영화「철길위에서」의 주연배우 맡았었고, 김일성의 외가인 만경대 칠골 출신이었다.

 


태어났을 때 집안이 하도 가난해 아궁이에 집어넣었다가 너무나 울어서 다시 꺼냈다는데 소탈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형이 보위성 작전국 작전부장을 맡고 있었고 부인 오영실은 독채상점 지배인이었다.

 


어느날 그 차계룡의 집으로 친구 성혜림이 찾아왔다가 우리 집에 들렸었다. 당시의 성혜림은 월북 작가 리기영의 아들인 리평의 안해가 되어 있었다. 또한 영화「분계선 마을에서의 여주인공을 맡으며 북한 주민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던 배우였다.

 


두서없이 이말 저말 옮기며 사는 이야기에 열중하던 내가 잠시 입을 다물자 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혜림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1: 영순아. 나 이제 배우생활 그만두고 5호댁으로 가.

여2: 5호댁? 네가 수령님 댁에 간단 말이야?

여1: 쉬---, 수령님 댁은 아니고, 그 자제분 댁이야.

여2: 정말?! 히야~ 너 정말 대단하다.

여1: 이거 절대 비밀인거 알지? 꼭 너만 알구 있어야 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살의 주부를 최고 권력자가 사랑한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동시에 남편 리평은 어떻게 하고?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하지만 나는 문밖을 나서는 그를 향해 이젠 볼 수가 없구나, 하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음악)

 


리평의 동생이 김정일과 대학 동기생이여서 리평의 집에 놀려갔던 김정일에게 성혜림이 띄었다는 소리도 있고, 4.25 영화촬영소를 지도하던 김정일에게 성혜림이 걸려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동기야 어찌되었건 북한의 절대자 김일성의 아들이 함께 살자는데 그 어느 여자가 감히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되어 그녀는 1969년, 중성동 15호 관저로 들어가 김정일의 처가 되어버렸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스물 여덟살, 성혜림의 나이는 서른 네 살로 그녀가 리평의 안해였다는 사실 외에도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에게도 비밀에 부쳐졌다.

 


그후 그녀는 1971년, 로동당 최고위 간부들만 드나들던 봉화진료소에서 김정일의 첫째 아들 김정남을 낳았는데, 폴란드 유학생 출신의 멋쟁이 녀성이 그녀의 해산을 돕게 되었다. 그리고 그 미모의 녀성에 의해 김일성도 몰랐던 김정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봉화진료소의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김정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국가계획위원회 국장 김하찬은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를 계기로 북조선의 국가보위부는 김정일의 여자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무법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아직 후계자의 지위가 든든하지 않았던 김정일의 도덕성을 건드렸던 문제임과 동시에 미래의 지도자 김정일에게 잘 보이려던 보위부 간부들의 이그러진 아첨 때문에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를 아는 북조선의 모든 사람들은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기막힌 처지에 빠지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도 그 즈음에 보위부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있었고 나의 운명 또한 저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남편으로 부터도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남: 영자, 우리 중국에 가서 살지 않을래?

여: 중국이요?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남: 그러지 말고 여기 좀 앉아 봐. 아무래도 부모님들이 계신 중국에서 살아야 할까봐.

여: 아니, 다 큰 사람이 부모님은 왜? 그런 얼토당토한 소리 하다가 다치지 말구 치료나 잘 받아. (음악) 나 직장 간다.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온 종일 그랬던 남편 생각으로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밤새 출입문을 열고 잤는데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 후인 7월 6일, “동명, 신의주에 있음”이라는 짧은 전보가 왔을 뿐이었다. 그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남편이 일하던『조선백과사전출판사』담당 보위원이란 사람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당신의 남편 김동명이가 중국으로 달아나려다 붙잡혔다”는 한마디를 내 뱉고 즉석에서 나를 돌려보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남편이 중국태생이고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문제를 불법 월경으로 끌고 갔을 뿐이지 내용은 전혀 달랐다는 것을 퍽이나 후에 알게 되었다.

 


나의 남편 김동명은 당시 함께 일하던 신광수란 사람에 의해 간첩으로 밀고 되었으며 1970년 7월 4일 북한 보위부에 의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무주고혼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때에 남편을 옭아 넣은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사건의 대명사가 돼 버린 요쿠타 메구미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국제 수배가 내려진 자다. 간첩이 되어 1985년 서울에 잠입했고 그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8년 12월 밀레니엄 특사로 출소했다.

 


일본은 그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6.15 정상회담 이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은 간첩에 불과한 신광수와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으로 보냈고 저들은 조선로동당으로부터 ‘조국 통일상’에 공화국 영웅칭호 등을 수여받기에 이르렀다.

 


(북한 녹음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령.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 선생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혀함에 대하여...’)

(음악)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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