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김정일 출생에 관한 진실
- 관리자
- 2010-05-20 12:56:41
- 조회수 : 2,353
<김정일과 생모 김정숙. 출처: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1982년 2월 초순경 조선중앙방송은 ‘지도자 동지의 40회 생일을 맞이하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사실 별다를 거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기사는 ‘김정일 출생 조작된 것’이라는 결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방송은 1981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의 ‘40회 생일’ 방송을 내보냈다. 2년 동안 연속으로 40회 생일을 기념한 방송을 하며 생일을 늦춘 이유는 김일성과 ‘꺾이는 해(정주년)’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10년, 20년, 같은 꺾이는 해를 대단히 중요시 하고 있는데 김일성이 태어난 해가 1912년 이다 보니 30주기에 맞추기 위해 출생 년도를 조작한 것이다. 1912년 생인 김일성이 70회 생일을 맞으면 자신은 40회, 80회 생일을 맞으면 자신은 50회가 된다.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사항은 북한 최고의 기밀이다. 1970년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있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방 전 사진과 증거물을 대부분 걷어갔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김정일은 1941년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의 공격을 피해 1941년경 이곳 소련군 영내로 옮겨왔고, 여기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 북한은 1982년 2월부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선전하고 있다. 1995년에 나온 『김정일의 약력』에서도 출생지를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백두산 밀영으로 구체화 해놓았다.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배경은 두 가지로 추측된다. 1980년대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시기다. 특히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 중에서 중국과 소련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일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창작한 이유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이른바 ‘항일 혁명역사’를 신비화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오래 유지하자는 ‘정치적 상징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은 김일성이 만주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에서 싸웠고, 중국 공산당의 지도에 의거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황장엽은 저서에서 “1940년 말에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교도여단에서 생활할 때 김정일이 출생하여 그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유라’라고 불렀으며, 둘째 아들도 ‘슈라’라고 불렀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황장엽은 “이 사실은 기억도 생생하다. 김일성이 어느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질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북조선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가 해방시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그 유명한 구호나무(김일성의 부대 부대원들이 항일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정일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글을 먹물로 새겼다는 나무)가 발견되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황장엽은 “김일성이 1940년 말에 소련에 들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단 말인가?”라며 이것은 역사위조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2.8.23일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2002년 8월 김정일이 열차편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김정일과 만남을 기대했던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여, 73, 브야츠크 거주)는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난 순간부터 떠난 날까지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김위원장은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세르게예브나는 “김일성은 1942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88여단에 소속된 3개 대대중 1개 대대를 지휘했으며, 이웃 주민들을 자주 병영으로 초대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시절 “김 위원장이 어린 시절 이곳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였다”고 증언했다.』
‘비극의 항일 빨치산’이란 저서를 낸 재일 논픽션 작가인 김찬정은 김정일 탄생시기인 1942년 당시 88독립특별보병연단 소속 소련인 통역관 스테판 니콜라야비치, 시로노프의 처 세로노바 등의 증언을 토대로 김정일의 브야츠크 출생설을 입증했다. 김찬정은 김정일이 브아츠크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불로시로프 중간지점인 남야영지 하마탄 부근의 소련병원에서 의사 왈야(당시 65세)의 도움을 받아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북한 당국은 ‘정일봉’과 ‘귀틀집’ 사이(고도차이)가 216m라고 말하며 그 기막힌 우연을 김일성 탄생을 신비화 하는데 선전하고 있다. 전기 ‘김정일 지도자’는 김정일이 탄생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날은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항일유격대 밀영지의 귀틀집들도, 충충히 들어선 수림도 수북이 눈에 덮여 주위는 온통 정갈한 은백색 세계였다. 그 황홀한 풍경, 신선한 아침과 함께 고고성을 울리시었다는 소식이 온 밀영지에 퍼져나갔다. 유격대원들은 누구나 이 경사를 혼자만 알고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발을 안고 불꽃처럼 나부끼는 붉은 깃발 아래 모여 서서 간절한 마음을 안고 그분의 미래를 축복하여 조국이 하루빨리 광복되기를 기원하였다.” 당시 부대장의 아들이 태어난 소식에 붉은 깃발아래 전원이 모여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고 광복의 염원을 빌었다는 것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다.
김정일의 탄생에 관련된 것은 김정일 일가의 혁명역사를 신비화 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된 것이다.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사항은 북한 최고의 기밀이다. 1970년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있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방 전 사진과 증거물을 대부분 걷어갔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김정일은 1941년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의 공격을 피해 1941년경 이곳 소련군 영내로 옮겨왔고, 여기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 북한은 1982년 2월부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선전하고 있다. 1995년에 나온 『김정일의 약력』에서도 출생지를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백두산 밀영으로 구체화 해놓았다.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배경은 두 가지로 추측된다. 1980년대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시기다. 특히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 중에서 중국과 소련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일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창작한 이유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이른바 ‘항일 혁명역사’를 신비화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오래 유지하자는 ‘정치적 상징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은 김일성이 만주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에서 싸웠고, 중국 공산당의 지도에 의거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황장엽은 저서에서 “1940년 말에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교도여단에서 생활할 때 김정일이 출생하여 그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유라’라고 불렀으며, 둘째 아들도 ‘슈라’라고 불렀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황장엽은 “이 사실은 기억도 생생하다. 김일성이 어느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질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북조선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가 해방시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그 유명한 구호나무(김일성의 부대 부대원들이 항일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정일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글을 먹물로 새겼다는 나무)가 발견되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황장엽은 “김일성이 1940년 말에 소련에 들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단 말인가?”라며 이것은 역사위조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2.8.23일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2002년 8월 김정일이 열차편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김정일과 만남을 기대했던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여, 73, 브야츠크 거주)는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난 순간부터 떠난 날까지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김위원장은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세르게예브나는 “김일성은 1942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88여단에 소속된 3개 대대중 1개 대대를 지휘했으며, 이웃 주민들을 자주 병영으로 초대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시절 “김 위원장이 어린 시절 이곳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였다”고 증언했다.』
‘비극의 항일 빨치산’이란 저서를 낸 재일 논픽션 작가인 김찬정은 김정일 탄생시기인 1942년 당시 88독립특별보병연단 소속 소련인 통역관 스테판 니콜라야비치, 시로노프의 처 세로노바 등의 증언을 토대로 김정일의 브야츠크 출생설을 입증했다. 김찬정은 김정일이 브아츠크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불로시로프 중간지점인 남야영지 하마탄 부근의 소련병원에서 의사 왈야(당시 65세)의 도움을 받아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북한 당국은 ‘정일봉’과 ‘귀틀집’ 사이(고도차이)가 216m라고 말하며 그 기막힌 우연을 김일성 탄생을 신비화 하는데 선전하고 있다. 전기 ‘김정일 지도자’는 김정일이 탄생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날은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항일유격대 밀영지의 귀틀집들도, 충충히 들어선 수림도 수북이 눈에 덮여 주위는 온통 정갈한 은백색 세계였다. 그 황홀한 풍경, 신선한 아침과 함께 고고성을 울리시었다는 소식이 온 밀영지에 퍼져나갔다. 유격대원들은 누구나 이 경사를 혼자만 알고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발을 안고 불꽃처럼 나부끼는 붉은 깃발 아래 모여 서서 간절한 마음을 안고 그분의 미래를 축복하여 조국이 하루빨리 광복되기를 기원하였다.” 당시 부대장의 아들이 태어난 소식에 붉은 깃발아래 전원이 모여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고 광복의 염원을 빌었다는 것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다.
김정일의 탄생에 관련된 것은 김정일 일가의 혁명역사를 신비화 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된 것이다.
<북한전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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