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권력승계] 3대혁명소조 운동의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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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1 10: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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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배경으로는 3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김정일의 등장과 유일지도체제의 형성이다.

3대혁명의 핵심적인 내용은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수행하는 것이고,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업을 사상혁명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혁명을 추진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상혁명을 위해 주체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강화하고 그것을 위한 혁명전통의 복원 그리고 그것을 학습하고 사회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유일지도체계가 필요했다.

1960년대 후반 김일성의 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고 혁명적 수령관에 의해 우상화가 실현되었으며,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당의 유일사상으류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확고한 기반 확립 이후, 김정일로의 후계문제에 있어서 부상한 것이 ‘대를 이어 혁명’이라는 구호였다.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와 후계자인 김정일의 전위대로서 새로운 세대에 의한 혁명위업의 계승이라는 명목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당내 세대교체 시기다.

북한의 지도집단 내에서 세대교체를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등장하면서 1970년 5차 당대회를 계기로 혁명 2세대 중심의 관료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의 지도집단의 변화와 배경에는 유일지도체제 형성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여지는데, 김정일의 등장과 입지의 공고화는 당내 세대교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청년동맹을 꼽을 수 있다.

1964년 제5차 당대회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을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바꾸고 청년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당적지도를 강화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국방에서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세대들로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대교체는 구체적으로 3대혁명소조운동을 추진하면서 중심세력을 청년, 지식인, 실무관료 중심의 체제로 운영해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셋째, 정치적 폐단의 극복이다.

3대혁명소조원의 지방 및 생산단위로의 파견은 당시 북한 사회에 만연했던 정치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당, 경제 및 행정 관료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현장의 실태 파악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며, 거짓보고를 일삼고 탁상공론에 빠져 있으며 법을 준수하고 옹호해야 할 당, 국가관료들이 법질서를 어기는 현상이 적지 않았다.

구간부들의 관료주의적 폐해가 극심하여 중앙의 의지와 명령이 하부단위에까지 잘 전달되지 않고 이 때문에 새로 건설한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이 필요로 하는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계들로 만든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인민생활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북한 지도부는 전면적인 경제개혁이 아니라 3대혁명소조원들을 각 부문에 파견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경제적 배경>

경제적 배경으로는 2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계획의 일원화·세부화 조치와 제1차 7개년 계획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부분적 실패로인하여 경제관리와 실적의 양 측면에서 나쁜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1960년 후반과 3대혁명소조운동이 진행된 1973년까지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1970년대 초 질적 성장 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거 요소투입을 통한 외연적 성장 방식을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과 맞물려 절대적으로 기술관료와 엘리트의 등장이 필요했고, 이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3대혁명소조운동이 필요했다.

둘째, 농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다.

북한은 1958년 농업집단화 정책을 마무리 한 후에도 협동화 과정과 이후 발생한 몇 가지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경영방법 및 농업 지도 방법을 개선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였다.

이에 농업관리 방법에 대한 집중적인 개조에 주력하였다.

3대혁명을 추진하면서 중점적으로 진행했던 것은 농촌에서의 기술혁명이었다.

이는 4대기술혁명과제로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였다.

이를 위해 전문지식을 갖춘 청년엘리트들을 지방의 농촌으로 내려보내 대대적인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기술개발, 개량을 통한 생산성 증대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농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정책적 배려였다.

농촌의 발전이라는 큰 명제 하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이 진행되었고, 농촌에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 배경>

사회적 배경으로는 3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도시농촌간 불균형이다.

북한의 농촌은 집단화를 위한 사회적 잉여를 도시 특히 공업부문에 집중투자하면서 ‘사회주의 원시축적’의 도구적 역할을 하였다.

전후 북한의 공업화 정책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벌려놓았다.

농민이 도시의 근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정치적 지위와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농촌의 집단화 이후에 나타난 농촌계급자체의 내부 분화 현상들 속에서 많은 문제를 안게 되었고, 이는 결국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정치적 불평등을 제거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농민이 당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590년대까지는 50-60%, 56년에는 40.6%로 떨어졌다.

정책 결정의 중심기구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경우 농민의 비율은 1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둘째, 노동력의 부족이다.

3대혁명소조원들이 가장 먼저 이룬 성과는 노력에 대한 예비를 찾아내는 것과 ‘인해전술’식 사업을 막았다는 것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이 천리마작업반운동의 혁명적 계승 차원에서 발기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비생산부문과 관리부문을 줄이고 공장의 노동력 관리 사업도 철저하게 진행하였다. 또한 여성의 고용 확대를 통하여 노동력의 부족현상을 만회하려 하였다.

셋째, 엘리트 정책의 변화이다.

북한은 1960년대 들어 공업화의 기초구축과 과학기술의 낙후라는 모순된 정책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식인 공급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 시기 “기술인재 양성사업을 추진시킬 데 대한 내각 결정 127호”를 통하여 대학의 숫자를 늘리고 재교육 및 여학생의 입학을 장려한다.

또한 대학기간 동안 실습교육을 완벽하게 실시, 실무에 투입하여 곧바로 현장의 생산시설을 능숙하게 작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지식인의 사회계급적 성격을 혁명성이 존재하는 계급, 즉 착취계급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인민과 노동계급을 위해 복무할 수 있도록 하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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