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제1화 저자의 이야기
  • 관리자
  • 2010-07-16 10: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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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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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제1화 “저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주인공)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하루 내내 어떻게 당에 충실할까만 생각했던 60년이었다. 무엇 때문에 북한에서 평생 충성경쟁을 하며 살았을까? 평범한 딸로서, 어머니로서 자유스럽게 살 수는 없었을까?

 


나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의 친구라는 단 하나의 리유로 정치범이 되어 짐승으로 몰락했고, 요덕수용소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가족 두 명이 굶어 죽었고 한명은 수용소의 강물에 빠져 죽었으며 요덕수용소에서 나온 후 아들 하나는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부모님과 아들의 넋이 아직도 요덕의 하늘을 떠돌고 있습니다. 나의 가족만이 아니라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희망 없는 삶에 기대여 주린 배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요덕수용소의 수감자들이 20만도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운 좋게도 2001년 북한을 탈출한 후 2003년 11월 25일에 대한민국에 왔습니다. 여기서는 작은 풀 한 포기조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북조선의 산과 들은 마치나 “위대한 장군”이라는 김정일의 의지에 따라 호흡하는 듯 했습니다. 메마르고 시들고, 산마저 민둥산으로 변해가는 마당에 서슬만 푸루르던 내 고향의 산야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공화국 주민의 17%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이곳 남조선에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3백만 명이 굶어 죽었고 내가 살던 함흥시에서만도 5만 명이 아사했습니다. 어린 꽃제비들의 시체를 대량으로 실어가던 트럭을 보며 가슴 아프던 일도 겪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탐욕이 전 국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전국은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철조망으로 뒤덮여 인민들의 소리죽인 한숨이 도처에서 울려 퍼졌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공화국을 탈출해 중국으로 나간 사람들은 낮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거지처럼 방황하거나 현대판 노예로 팔려가는 비참한 사람들로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중국을 경유하여 대한민국의 품에 안길 수 있었고, 이제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생각하기도 끔찍한 나의 과거를 되새겨 보면서 자유북한방송의 청취자 여러분들과 이렇게 마주 앉은 것은 공화국의 인권문제를 짚어보면서 인간의 삶을 론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유에 한없이 감사하며 한편으로는 굶어 죽었을 수용소와 함흥의 이웃들 때문에 가슴이 젖어듭니다. 요덕수용소를 겪었으면서 탈출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서 저의 이야기는 공화국 사람들의 처참한 삶에 대한 고백이자 기록이 될 것입니다. (효과 음악)

 


(설화: 남) 친애하는 동지들에게.

 


김영순 여사는 우리 탈북자들 속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귀중한 동지입니다. 그것은 그가 북한 독재집단의 가장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적, 인민적 량심을 지켜 왔으며 사선을 넘고 넘는 과정에 인격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영순 동지가 악을 끝까지 반대하고 민족과 인민의 념원을 끝까지 지켜 온 그 불요불굴의 투쟁정신과 원칙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우리 탈북자들의 자랑으로 여길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낳은 애국지사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자기 내연의 처인 성혜림을 잘 안다는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김영순 동지를 수용소에 감금했던 때는 그가 아직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1970년대입니다. 자기의 이른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고한 인민들을 수용소에 감금한 사실만 놓고도 김정일 독재체제의 야만적인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영순 동지의 수기는 그러한 김정일 체제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북한 독재의 진상을 이해하고 남과 북의 애국적 인민들의 반독재, 조국통일 의지를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서울에서 황장엽부터. (효과 음악)

 


(설화: 여) 라디오 방송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씨는 1937년 중국 요녕성 심양시 서탑가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수료했으며, 인민군협주단 무용배우, 중위로 13년 근무, 이후 평양시 보통강구역 외국인 여행자 상점 상업부 지도원으로 일한 바 있습니다.

 


(설화: 남) 평양의 외국인 여행자 상점 지도원으로 일하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됐으며 9년 간의 수용소 생활이 끝나자 중국으로 탈북, 200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입국하게 됩니다.

 


(설화: 여) 대한민국에 입국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영순씨는 열악한 공화국의 인권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유엔을 방문하고 증언하는 등 영국과 벨기에, 미국과 일본 등지를 쉼 없이 누벼갔습니다. 또한 공화국의 정치범 수용소의 현재를 재현한 가극 “요덕이야기”의 안무를 담당했으며 “북한민주화원회 고문, 사단법인 탈북예술인 총연합회 이사,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본부의 이사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설화: 남) 그럼, 다음 이 시간,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연재 되게 될 라지오 방송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를 기대해 주십시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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