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오빠 제발 차에서 떨어져 죽어야 한다.
  • 관리자
  • 2010-05-10 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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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기독교를 믿다가 북송 된 탈북자의 기구한 운명

“오빠야 가다가 차에서 떨어져 죽으라”오빠에게 이 말 밖에 해줄 수 없었다며 오열을 터뜨리는 한 탈북여성이 있었다.

올해 38세인 김명실(가명)씨는 10일 자유북한방송의 대담에 출연해 중국에서 기독교를 믿었다는 죄를 짓고 정치범으로 끌려간 오빠와의 마지막 만남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2001년 5월 12일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 세관으로 짧은 반바지 차림에 수갑을 찬 100여명의 탈북자들이 북송돼 나왔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기독교 공부를 하다가 잡혀 온 탈북자들이였다.

이들 100명 속에는 김씨의 오빠도 있었다. 2001년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탈북 했던 김씨의 오빠는 우연히 교회관계자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중국 시안(西安)에 갔다. 2001년 당시 시안(西安)에는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을 모여 놓고 북한선교를 준비하던 비밀선교기지가 있었다.

여기에는 중국전역에서 모여온 탈북자들이 은신해 있었다. 안전에 만전을 기하며 은신해있던 탈북자들의 거처지가 발각 된 것은 집단 내부에 있던 탈북자들의 실수 때문이었다.

교회 측은 시안(西安)의 비밀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탈북자들에게 생필품을 사는데 쓰라고 한달에 중국 돈 30위안(한화 3500원정도)씩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용돈을 쓰지 않고 저축해 두었던 두 명의 탈북자가 수중에 얼마간의 돈이 모여지자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주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모험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무산군 삼봉지역에서 국경경비대 초소에 걸려들었고 보위부로 끌려가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뜻밖에 중국 시안(西安)에 100명의 탈북자가 비밀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특급정보를 입수한 북한보위부는 즉시 탈북자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북한보위부는 중국안전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으며 중국 측의 동의를 얻어 무장한 탈북자 체포조를 시안에 급파 했다.

2001년 5월 6일 중국 시안(西安)의 비밀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탈북자 100여명은 북한보위부와 중국공안의 협동작전으로 전부 체포됐다.

이날 북한보위부와 중국공안은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대동하고 탈북자들의 거처지를 포위, 급습했다. 거처지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탈북자들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전원이 체포 되었다. 이들은 트럭에 태워져 중국공안국에 끌려가 탈북자 확인절차를 마친 뒤 북한 보위부원들에게 끌려 곧바로 북송됐다.

도문-남양 세관을 거쳐 북송 된 이들은 온성보위부 구류장에 수감 되었다. 100명 집단의 책임자를 지냈던 탈북자와 기독교 신앙이 특별히 깊었던 그래서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두 명의 탈북자는 온성보위부에 도착하는 즉시 총살됐다.

나머지 탈북자들은 1개월 동안 온성보위부에 있다가 거주지 보위부로 이송 되였다. 김명실씨의 오빠도 호송하러 온 두명의 보위부원들에 끌려 고향인 함경남도 허천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오빠는 호송도중 수갑을 찬 채로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삽시간에 명실씨의 오빠는 탈주범이 되었고 함경남도 북부일대의 길거리 마다 그의 체포 수배전단이 나붙었다. 다시 탈북 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걸 알았지만 한달동안 온성보위부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김씨의 오빠는 도저히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형편 이였다.

할 수 없이 그는 동생인 명실씨의 집에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은신해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명실씨는 오빠를 탈북 시키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허천읍 시내를 벗어나기도 전에 매복하고 있던 안전원들에게 체포됐다.

기독교를 믿은 정치범에 탈주 죄에다 재 탈북 기도까지 어마어마한 죄명을 쓰고 있는 김씨의 오빠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보위부에 끌려간 그의 오빠는 그를 놓쳤던 보위부 지도원들의 화풀이로 거의 반 주검이 되게 구타당했다.

명실씨 역시 수배자를 숨겨 줬다는 죄명을 쓰고 안전부 반탐과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죽어도 조국을 버릴 생각은 안했다고 강력하게 뻗친 덕에 명실씨는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의 오빠는 도 보위부로 이송되게 되었다.

오빠기 떠나기 전날 명실씨는 오빠와의 면회를 허락받았다. 이미 반 주검이 되어버린 오빠의 모습에 그는 눈물지으며 “오빠 이제 가면 죽을 건 뻔 한데 거기 가서 고통스럽게 죽지 말고 가는 길에 차에서 떨어져 죽어. 그럼 죽을 때 편하기라도 하지.”라고 말했다.

오빠는 그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나 일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양손과 두발을 포승에 꽁꽁 묶인 채 승용차에 오르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동생을 향해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오빠가 잡혀 간 후 명실씨의 집에는 가택수색이 들어왔다. 수색과정에 가장집물이 모두 파손됐다.

더는 북한에서 살 수 없게 된 명실씨는 가족을 이끌고 탈북 해 대한민국에 왔다. 그는 아직 오빠의 생사도 모른다면서 오빠에게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지 못한 죄책감에 눈물지었다.

/김대성 기자 lstarkim@naver.com /자유북한방송 [200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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