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10-07-16 10: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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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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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5화 “평양예술대학과 인민군 협주단, 그리고 성혜림”을 들으시겠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복구가 시작되었다. 거리와 마을에는 구호와 깃발이 범람하고 있었다. “전체 인민들이여, 모두가 전후 인민경제 복구건설에로 떨쳐나서자!”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기술 있는 사람은 기술로!”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모란봉 구역 긴마을 동에 있는 공설운동장 건설에 동원되군 했다. 하루 종일 들것을 메고 다니는 통에 살갗이 벗겨지고 어깨가 부어오르곤 했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춤추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았으며 결국 1953년 11월에 설립된 국립무용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20대 1의 비률로 진행된 입학시험의 최종 심사자로는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 선생과 발레무용의 대가 조성찬 선생등이 나왔던 퍼그나 긴박한 입학 과정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후 평양종합예술학교로 개편된 그곳에서 성혜림을 알게 된 나는 영화인이 되고 싶다던 그와 가까워 졌고, 그가 예술영화 촬영소에 배치 받은 후에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쌍꺼풀 없는 가는 눈매에 웃으면 양쪽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 하던 친구였다.
나는 나대로 인민군협주단에 입대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터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군 했다.
당시의 혜림이는 로시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한 청년과 사귀고 있었다. 이름은 리평, 북조선에 꽤 유명한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 리기영의 아들이라고 했다. 어떤 날에는 리평이 소포로 보내준 화장품을 들고 나의 방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여1: 영순아. 이거 뭔지 아니?
여2: 화장품.
여1: 글쎄, 화장품은 맞는데 어느 나라 건지 알아 맞혀 보란 말이야.
여2: (시치미를 떼고) 일본 거? 아님 중국 거? 아 맞다. 대만거지?
여1: 너 정말 시치미를 뗄래? 리평동무한테서 온 거란 말이야.
여2: 오호~라. 리평 동무. 그 동무 지금 쏘련에 가 있던가? 그럼 쏘련에서 왔겠네 뭐. (웃음)
마음씨가 착하고 오래된 친구라, 전공이 달라도 늘 절친하게 지내던 혜림이었다. 때로는 내가 생활하던 인민군협주단에도 찾아오군 했는데 협주단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그러는 혜림이를 향해 협주단의 조직 배경이며 구성부분들을 꽤나 진지하게 설명하던 기억도 난다.
조선인민군협주단은 1947년 정률성이 창단한 민족군대 협주단의 후신이다. 「조선인민군 행진곡」과 「팔로군 행진곡」을 지은 팔로군 출신의 저명한 음악가 정률성은 민족군대협주단을 창단하고 얼마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뒤, 조선인민군 협주단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지금은 북조선의 대표적 공연단체로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조선인민군 연극단을 통합해 모든 형태의 무대 공연을 소화하는 대규모 예술 집단이 되었으며 특히 100명으로 구성된 공훈합창단의 명성은 외부에도 잘 알려진 상태이다. 또한 조선인민군협주단은 김정일이 제일 아끼는 예술집단 중 하나이며 공산주의 국가 합창단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러시아 붉은 군대의 합창단처럼 나름대로의 실력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협주단에서는 성악배우, 기악배우, 무용배우, 희극배우 등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인민군 총정치국 528군부대 소속으로 배우들은 빨간 바탕에 노란 하프가 상징으로 그려진 계급장을 달고 있다.
협주단 배우들은 북한에서 말하는 당의 배려를 넘쳐 나도록 받는 예술인들이다. 구성원들은 군무자 경연대회에서 뽑힌 사람, 예술대학 출신 등 형형색색이다.
전쟁 때 월북한 남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월북 예술가들로는 성악가이며 예술부단장을 지낸 최창은이 있는데「압록강 2천리」가 그의 대표곡이다. 파곳주자 현경석과 첼로의 리강렬, 바이올린의 최창범과 플루트의 이규운도 모두 월북 예술가들이다.
또한 남한의 최가야 무용단 에서 활동하던 강원옥, 림안제, 최경애, 리정심, 정옥숙 등이 전쟁 시기에 월북해 협주단으로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작곡가로는 박한규, 한시형이 있었고 고전 음악에는 류정철이 있었다. 최승희 선생의 조카로서 역시 월북했던 최로사는 외국공연단이 오거나 주요공연에서 프로그램의 번역을 맡았고 「샘물터에서」라는 전시가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러한 인민군협주단은 단장, 정치부단장, 예술부단장, 행정부단장 등의 간부진과 2천명 규모의 배우, 스탭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창은, 원정소, 김승조, 설명순이 차례로 단장을 맡았고 원정소 단장 시절에는 정치부단장으로 의붓 오빠 김석산도 근무한바 있는 곳이다.
이곳 인민군 협주단에서 나의 처녀시절이 흘러갔다. 계급은 중위였으며 직급은 무용과 배우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성악과나 기악과 연주자들 중에서 배우자가 될 만 한 사람을 눈여겨 살펴보기도 했다.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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