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北에서 벌어진 '김정일 아들' 빙자 사건
  • 관리자
  • 2012-05-15 02: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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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장군님 서기실인데 장군님의 아드님이 한 시간 뒤쯤 도착할 테니 비상대기 하고 보안사항이니 발설하지 마시오.”

2002년 8월 북한 대외보험총국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당 책임비서는 잔뜩 긴장했다. 그는 한 시간이 되기 전부터 정문 앞에서 ‘장군의 아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뒤 한 시간쯤 지나자, 대형 벤츠 한 대가 총국으로 들어섰다. 차량 번호도 중앙당 부부장급 간부들만 달 수 있다는 ‘2.16(김정일 생일)’으로 시작했다. 벤츠에서 내린 ‘D라인’의 그 청년은 영락없는 ‘장군의 아들’이었다.

책임비서는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핏기없는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렁찬 목소리로 거수경례를 했다. 장군의 아들은 예상한 대로 거만했고 몸짓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웠다.

책임비서 사무실로 들어간 장군의 아들은 보안을 강조하며 “다른 사람을 방에 들이지 마라”고 했다. 이어 영광스런 말씀이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장군님을 모시고 대외보험총국을 방문하려고 한다. 그래서 점검차원에서 나왔으니 모실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었다. 책임비서는 감격했다.

icon_img_caption.jpg 사진은 2011년 5월 김정일이 방중 당시 탔던 차량인 독일제 ‘메르세데스 벤츠 S600 풀맨 가드’의 모습.
장군의 아들은 또 “장군님을 모시는 준비 차원에서 고가의 물품들을 보내주겠으니 일단 외화 2만 달러를 가져오라”고 했다. 장군님의 은혜에 감격한 책임비서는 은행 ATM(현금 자동 입출금기)보다 빨리 돈을 가져왔다. 장군의 아들은 책임비서의 충성심을 격려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자랑스러운 ‘2.16 벤츠’를 타고.

책임비서의 ‘행복한 상상’은 그날 하루뿐이었다. 그는 장군의 아들이 다녀간 다음 날 바로 해임됐다. 그가 깜빡 속은 장군의 아들은 실은 ‘평양조명기구공장 청년동맹위원장’이었다.

탈북자 인터넷신문 뉴포커스는 2002년 이 같은 내용의 ‘김정일 아들 빙자 사기극’이 있었다고 14일 소개했다. 이 얘기는 2003년 이후 탈북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북한 내에서 유명했던 사건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내막은 이렇다.

◇그는 어떻게 ‘2.16 벤츠’를 타고 올 수 있었나
훗날 국가보위부 조사에서 밝혀진 데 따르면 범죄에 이용된 중앙당 간부차는 ‘장군의 아들’이 중앙당 간부 운전기사를 매수한 것이었다.

기관에 등록된 북한의 모든 운전기사는 한가한 시간에 차를 이용해 돈을 번다. 국가가 차량 부속품과 기름을 공급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운전사가 직접 벌어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급 이하 간부 운전기사들은 이런 명분으로 공무차를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뒷돈을 챙긴다.

하지만 중앙당 간부 차 운전기사들은 전적으로 배급과 월급에만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차만 명품이지 다른 간부 차 운전기사들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생활을 해야 한다.

장군의 아들은 바로 이 점을 노려 어느 정부청사 앞에 주차 중이던 중앙당 간부 차 운전사에게 접근했다. “미화 10달러를 주겠으니 대외보험총국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돈이 궁한 운전사는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북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도 속을 만했다
2002년부터 북한에선 후계절차의 첫 단계라고 볼 수 있는 후계자 어머니, 즉 김정일의 부인 신격화가 시작됐다. 당시 김정일은 유방암을 앓는 처에 대한 연민으로 간부들 앞에서 자주 고영희 이야기를 꺼냈다.

고영희 우상화가 본격화되던 시점이었기에 책임비서는 김정일 아들의 등장에 ‘황송’하기만 했던 것이다.

◇D라인으로 마지막 남은 의심까지 완벽히 차단
북한에선 “살이자 인격이다”라는 말이 있다. 북한 주민들은 대개 깡 마르고, 간부들은 뚱뚱해서 아이들은 간부인 친척을 자랑 할 때 “우리 친척 중에 배 나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책임비서가 보기에 중앙당 간부 차에서 내린 ‘D라인’의 뚱뚱한 젊은이는 ‘위대하신 장군님’의 아들임이 당연해보였다.

북한 국가보위부는 전국 각지의 기관, 동, 인민반들에 ‘장군의 아들’ 수배사진을 돌리고 나서 한 달 후 범인을 잡았다. 그는 대담했던 범행 수법과는 반대로 달러번호를 추적한다는 소문 때문에 2만 달러 중 단 1달러도 쓰지 못한 ‘소심남’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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