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40년 전인 1972년 7월4일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남북 당국 간 첫 번째 합의로 불리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발표한 이 성명이 대내외에 던진 충격파는 매우 컸다. 그만큼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명은 우선 자주적·평화적·민족대단결로 통일을 이룬다는 '통일 3원칙'을 처음으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 중상비방·무력도발 중지, 다방면적 교류, 적십자회담 성사, 서울-평양 직통전화 가설,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 군사적 대치국면에서 좀체 기대하기 어려운 합의들을 담아냈다.

합의 도출 과정도 극적이었다. 이후락 부장이 1972년 5월2∼5일 비밀리에 평양을 찾아 김영주 부장과 회담을 했고, 북한에서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그해 5월29일∼6월1일 극비리에 서울을 다녀갔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성명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死)문서'가 되고 만다. 양측이 '통일 3원칙'에 대한 해석을 놓고 성명 발표 직후부터 옥신각신한 탓이다.

북한은 '자주' '평화' 원칙을 즉각적인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남측은 여기에 신뢰 구축에 이은 단계적인 군축이라는 입장으로 맞섰다.

'민족대단결' 원칙에서도 입장은 갈렸다. 남측은 민족대단결이 민주화와 인권보장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입장을 전개했지만 북측은 국가보안법 철폐, 민주인사 석방 등을 들고 나왔다.

똑같은 문구를 두고 나온 이런 판이한 해석은 결국 정치권력 강화라는 목적을 가진 남북 권력자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실제로 7·4성명이 발표된 지 반년 뒤인 같은 해 12월27일 남북은 약속이나 한 듯 권력 강화로 요약되는 개정헌법을 공표했다.

즉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지도원칙으로 삼는다"는 규정과 주석제를 집어넣은 개정 '사회주의헌법'을 만들었고,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유신헌법'을 채택했다.

7·4성명이 비록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남과 북의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역사적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는 평가도 많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3일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도출하지 못하고 합의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대화없는 대결' 상황에서 나름대로 대화하면서 합의이행을 모색하는 등 대화의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공(功)이 더 많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7·4성명 이후 남북간 교류와 접촉이 크게 늘었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 6·15공동선언 등이 내용면에서는 7·4성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평가로 보인다.

북한매체들은 올해도 7·4성명 발표 40돌을 맞아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은 획기적인 사변"이라며 성명의 의미를 부각하는 글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들 매체가 주장하는 '통일 3원칙'은 여전히 '외세의존 배격' 등 주한미군 철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