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제10화 수감자들(1)
  • 관리자
  • 2010-07-16 10: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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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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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10화 “수감자들(제1편)”을 들으시겠습니다.

 


마을 단위의 작업반은 선생님으라 불리는 담당 보위지도원이 통제했다. 우리 제3작업반은 현청룡 중좌가 담당이었다. 모두가 정치범이라 감시하는 보위지도원도 계급이 높았다.

 


우리 가족이 처음 들어간 집은 두 세대가 사는 일자형 초가집으로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딸려있었다. 굴뚝이 다닥다닥 붙은 하모니카 주택인데 분조장이 비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분조는 통상 8세대에 노력자가 15명 가량으로 공동작업을 했지만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처지에서 일하고 생활해야 했다.

 


수용소에 들어온 이튿날, 작업반장은 아침에 일하러 나오라며 통강냉이 며칠 분과 낫을 가제다 줬다. 망돌을 빌려 서툰 솜씨로 강냉이를 갈았다. 아버지는 벌써 병으로 누우셨고 나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난생처음 낫을 쥐고 산으로 올랐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봐도 흐르는 건 눈물뿐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두메산골 수용소로 왔단 말인가. 일곱 식구에 노력자는 나 하나 뿐이고 생활은 자급자족이라니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60세 이상 노인들은 밭에 물을 주거나 비교적 쉬운 로동이 차례진다. 나는 장본인이자 원노력자여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농사 경험도 없는 녀자가 자식과 부모를 어떻게 부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굶어 죽을 일만 남은 셈이었다.

 


나무를 엮어 짊어지고 몇 번이나 자빠졌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산을 내려왔고 그날 내가 해 온 나무를 본 동네 아주머니들이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에구머니, 그 나무를 때면 옻이 올라 죽으니 갖다 버려요.”

 


애써 해 온 나무들을 다 버렸다. 다행히 분조장이 나무를 갖다 줘서 그날은 겨우 불을 땔 수 있었다. 구둘 목은 밥할 때만 잠시 따뜻해 지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내 식어버리군 했다.

 


아침이면 아직 어슴푸레할 때부터 일하러 나오라고 시끄럽게 불러냈다. 때가 가을걷이 철이라 낫을 들고 일을 나가군 했다. 난생 처음 낫을 쥐고 추수를 마친 빈 강냉이 대궁을 베는데 어디서부터 베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다가 다른 사람이 대여섯 개 벨 때 겨우 한 대궁을 소고기 썰 듯 했다. 먼저 입소한 사람들은 그러는 나를 보고 혀를 차군 했다.

 


일하는 것이 우스웠으리라. 너무 높이 잘라 욕도 얻어먹었다. 베다 보면 남들은 고랑 끝 저 멀리 사라져 갔는데 아직 혼자 초입에서 애를 쓰고 있었다. 갑작스런 노동이 몸에 배지 않아 몸살로 잠시 맨땅에 누워 쉬기도 했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세상에 보도 듣도 못한 일을 하는구나.”하시며 아저지가 눈물을 지으시군 했다.

 


열두 시가 되고 점심시간이면 30분 가량 집에 돌아가 밥을 먹군 했다. 자식들이 어리고 아버지가 편찮은 터라 이렇게나마 잠시 집에 들락거릴 수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처음엔 설사를 계속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었지만 한 달이 지나자 차차 적응되기도 하던 수용소 생활...

처음에는 경비원들의 총칼 앞에서 로동을 했지만 입소자들이 반발로 인해 그러한 통제를 벗어나 일할 수 있었다. 개개인의 모든 행동과 사항은 곧바로 상부에 통보되었다.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 15호 수용소 보위부 청사 내의 구치소로 끌려갔다. 보위부 청사는 정문에서 약 1백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곳 보위부 구치소로 한번 끌려가면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고 소문나 있었다.

구치소로 끌고가는 방법도 다양했다. 현장에서 체포하거나, 사상투쟁회의 장소에서 끌고 가거나,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등 갖가지 귀신 몰래 구금한후,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군 했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수용소 내 수감자의 30% 정도가 구치소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타민PP 결핍으로 인한 “펠라그라 병”과 같은 병에 걸려 하루 하루 소멸되어 갔다.

수용소에도 학교가 있지만 제대로된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보위원들의 자식이 선생이 되며 학생들은 단지 토끼 사육공에 불과했다. 학생들이 토끼풀 뜯기와 같은 과제를 다 수행하지 못하면 벌을 세우고 집에도 안 보냈다. 아이들끼리 선생과 학생이니 제 맘대로 때리고 벌세우는 게 다반사였다.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의 죄명을 보면, 김일성의 목에 혹이 있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김정일의 석고상을 실수로 깨버린 사람, 김일성 초상휘장을 훼손한 사람, 김일성․김정일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김정일의 후처 성혜림과 아들 김정남에 대한 말을 한 사람, 남한방송을 청취한 사람, 심지어 상점에 물건이 없다고 말한 북송 교포들까지 다양했다.

 


우리 3작업반에 있던 38세 가량의 오순희는 남자만큼이나 일을 잘하고 순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유일사상 체계가 확립되기 전에 뉴스를 보았다. 텔레비전은 동네에 한집이나 있을까 말까할 정도였으니 모여서 보았다고 한다. 뉴스에 김일성이 나왔는데 목에 혹이 났다는 말을 한 것을 누가 고발해 끌려 들어왔다. 장본인인 시아버지가 죽자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손자가 함께 출소했다.

 


남한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야 죄는커녕 웃을 일도 아닌 행동이 죄명이 되어 8년, 10년을 갇히거나 영영 죽게 되는 판이다. 도대체 그런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그 뿐이 아니다. 15호 수용소 입구 우측에는 정신병자 수용소가 따로 있다. 북한 전역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다가 걸려든 정신병 환자들을 가두어 놓고 결국 죽여 버리고 마는 곳이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무슨 말인들 못 하랴만 김일성, 김정일을 비방, 중상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무자비 하게 끌고와 죽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병이 가벼운 자는 일을 시키기도 하지만, 중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독방에 가두어 버린다. 심한 경우 수감자들을 모두 모여 놓고 시범을 보인다며 공개총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물론 죽으면서 남길 저들의 마지막 하소가 두려워 입에 자갈을 물린 채 쏘아죽이는 식이었다.

 


(공개 총살 비디오 영상의 녹음 삽입)...민족 반역자들을 향하여, 단발로 쐈!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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