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11-08-04 11: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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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례(가명, 57세). 그녀는 북한 인민군 상위(우리나라 중위와 대위 사이의 계급) 출신이다. 북에서 중대장까지 했다. 그녀와 남편 모두 노동당 당원으로 평양에 거주했다. 이른바 당성이 투철한 북한내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지난달부터 그녀는 평통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와 진보연대 앞에서 2인1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녀가 목에 건 두툼한 마분지에는 ‘김정일 추종하는 진보연대 해제하라’등의 구호가 적혀있다.
시위에는 탈북 북한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북민전)’ 소속인 김춘례씨를 비롯 모두 6명의 탈북여성들이 함께 하고 있다. 백년만의 폭우와 숨막힐 듯한 무더위속에서 한 달 가까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세 번의 탈북시도와 두 번의 강제북송, 6년에 걸친 탈북 엑소더스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근처 경찰 지구대 앞. 처음에 김춘례씨는 별로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부담스러워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되고 나서 그녀는 가슴속 깊이 묻어 놓은 한 서린 이야기들을 1시간 넘게 토해냈다.
그녀는 두 딸과 아들을 데리고 2003년 6월 한국에 입국했다. 세 번의 탈북시도와 두 번의 강제북송, 중국에서 베트남 다시 캄보디아와 태국을 거쳐 한국 땅을 밝기까지 6년. 노예와 같은 중국생활, 인신매매와 납치까지 당해봤다.
기적같이 두 딸과 아들을 찾아 한국 땅을 밟은 지 이제 8년, 당시 19살이던 아들은 27살이 됐다. 당원이던 남편은 그녀가 북한을 떠난 후 남아있는 어머니와 아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장사를 하다 적발돼 교화소로 끌려가 굶어죽었다.
인터뷰 중간 그녀가 갑자기 활짝웃으며 말한다. “저 이제 부자됐어요”
입국할 때 네 명이던 가족이 두 사위를 합쳐 모두 8명으로 늘어났으니 부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인터뷰 사이사이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95년 6월, 평양에서 식량배급이 끊기다...큰 딸 북중 국경근처서 실종
김일성이 죽은 후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평양에서 식량배급이 끊긴 것은 95년 6월 하순. 당장 끼니를 잇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와 남편 모두 당원신분이라 장사도 할 수 없었다. 당시 11살이던 아들은 굶주림에 독초를 먹고 죽다 살아났다.
97년 시어머니가 혼수로 가져온 밥사발(골동품)을 팔기 위해 함경북도 북중 국경부근으로 큰 딸을 보낸다. 그러나 밥사발을 팔아 오겠다던 큰 딸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97년 첫 번째 탈북...국경 넘자마자 둘째 딸 인신매매꾼에게 빼앗겨
둘째 딸을 데리고 큰 딸을 찾아 국경으로 갔다. 그녀는 둘째 딸에게 통행증이 없어 그녀가 붙잡히더라도 네 언니를 꼭 찾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국경근처에서도 큰 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딸을 찾기 위해 그녀는 국경을 넘었다. 그녀의 기나긴 탈북은 이렇게 시작됐다.
국경을 넘자마자 그녀와 작은 딸을 기다린 건 인신매매조직이었다. 손한 번 써보지 못하고 둘째 딸마저 빼앗겼다. 정신없이 딸들을 찾아 헤맸다.
수소문 끝에 둘째 딸이 흑룡강성의 한 농가로 중국돈 4천원에 팔려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둘째 딸을 되찾아 온다. 그리고 그녀는 돈 4천원 때문에 노예와 같은 생활을 견디며 중국에서 숨어지낸다.
99년부터 탈북여성 노린 납치꾼 등장, 1차 강제 북송
그러던 99년, 이번에는 납치꾼들이 탈북여성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신매매꾼들보다 더 사악했다. 같은 해 7월 숨어있던 농가에 납치꾼들이 들이닥쳤다. 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그녀와 딸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시 딸을 뺏길 수 없다는 모성애는 그녀를 격렬하게 저항토록 만들었다. 다행이 딸을 지켜냈다. 그러나 소란이 일면서 그녀가 탈북자라는 신고가 중국공안에 들어갔다. 공안에 붙잡힌 그녀와 딸은 북으로 압송됐다.
당시 북한 김정일은 탈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생계형 탈북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처분할 것을 지시했다. 덕분에 단련대(일종의 경범죄자 수용소)로 보내진 그녀는 3일만에 다시 탈출에 성공했다.
딸은 단련대에 그냥 두고 왔다. 먼저 탈출해야만 어린 딸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철 폭우로 강물이 넘친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 급류에 떠밀린 그녀가 정신을 차린 곳은 중국 화룡시 룡현. 급류에 쓸려가는 그녀를 용케도 중국인이 구해냈다. 그곳에서 다시 숨어지내며 둘째 딸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둘째딸은 99년 11월 단련대를 나와 어머니를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두 번째 납치위기 모면, 2차 강제 북송과 목숨을 건 탈출...6년만에 찾은 큰 딸
다음해 그녀와 딸은 두 번째로 강제 북송됐다. 이번에도 딸을 노리던 납치꾼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중국공안에 붙잡힌 것이다. 두 번째 북송. 이번에는 함경북도 청진 집결소에 수용됐다.
40일이 지나 원래 거주지인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또 다시 탈출, 세 번째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딸을 찾기위해서였다. 마침내 잡지에 큰 딸을 찾는 광고를 냈다. 기적같이 큰 딸은 광고를 봤다. 밥사발을 팔아오겠다던 큰 딸은 그렇게 6년만에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녀가 떠 난후 아들은 부랑자로, 남편은 교화소에서 아사(餓死)
북에 있던 아들과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 되었다. 친적과 지인을 통해 찾아봐도 아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나중에야 그녀는 아들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부랑자가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큰 딸을 찾아 집을 떠난 후 생계가 막막했던 남편은 당원신분에도 불구하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결국 남편은 이 사실이 적발돼 평안남도 증산에 있는 제11교화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아사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아들은 진짜 오갈 데 없는 부랑자가 됐다.
다행히 친척의 도움으로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탈북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자녀를 모두 찾은 그녀는 두 딸과 아들을 데리고 남으로 남으로 길을 떠났다.
아들과 딸 데리고 베트남으로...5시간이면 올수 있는 거리 6년 걸려
청도 한국영사관에 수 차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영사관측은 관내로 들어만 온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사관 앞을 지키는 공안까지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영사관 진입을 포기하고 베트남까지 정말 길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고난 끝에 베트남에 도착한 그들은 다행히 탈북자들의 한국입국을 돕는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녀 가족은 캄보디아와 태국을 거쳐 2003년 6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5시간이면 오잖아요? 그런데 우리 가족은 6년이 넘게 걸렸어요”
고난의 세월을 웃으면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든는 이의 목을 메이게 했다.
집결소에서의 하루...구타보다 끔찍한 이와 빈대
“구타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구타는 당연한 듯 말했다. 그런데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밤이면 빈대가 온몸을 물어 뜯어요.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알 수가 없습니다. 밤새 빈대에 물어뜯기다 새벽 5시 기상시간이 돼 자리에서 일어나면 여기저기서 빈대가 우수수 쏟아졌어요”
집결소에 있는 동안 그녀와 딸은 밤이면 창문위에 올라가 철장을 부둥켜 안고 꾸부정히 앉아 밤을 세웠다. 잠을 자기란 불가능했다.
“창문에 박쥐처럼 붙어 있으면 빈대에 뜯기지는 않아요. 대신 모기에 물리는데 그게 훨씬 낫지요”
새벽 5시 기상해서 노동을 시작하는 집결소에서 노동과 구타보다 더 무서운 건 이런 이와 빈대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하는 좌파 사람들, 북한에서 실제로 살라고 하면 아마 하루도 못버틸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끔찍한 한달동안의 집결소에서 탈출, 150리길을 건너 세 번째로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다.
한국행 결정하고도 “상처 입은 아이들, 남한사회 적응 잘할까 고민”
“한국에 들어오기로 마음먹고도 고민이 많았어요”
그녀는 한국행을 결정하고도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려서 너무나 큰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한국사회에 제대로 적응할지 걱정이 앞섰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의 고민을 알았는지, 누구보다도 적응을 잘 해주었다. 큰 딸은 하나원 교육을 마친지 13일 만에 취업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무서운 세뇌교육, “북한군 악밖에 남은 것 없어”
그녀는 북한 세뇌교육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어려서부터 남조선 사회에 대한 세뇌교육을 받고 자란 탓인듯, 한국행을 결정하고도 부정적 인식을 털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에 대한 그녀 가족의 불안을 잠재운건 한국 드라마였다고 한다.
“북한은 지금도 세뇌교육중이에요. 적화통일, 한번은 싸워야 한다는 내용을 어려서부터 교육시킵니다”
우리 젊은 세대와 군대에 대한 걱정도 털어놓았다.
“지금 북한군이나 주민들은 악밖에 남은 게 없어요. 사상만큼은 정말 특출합니다. 그에 비해 한국 군인들의 모습은 너무 평화스러워 보입니다”
시위를 하며 생긴 일...평통사 사무처장 “제주해군기지는 북과 맞서기 위해 만드는 것”
“평통사 앞에서 시위를 할 때 그곳 사무처장이라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자기들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다면서 주한미군철수와 군 작전권 환수를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북한군은 남한군보다 배나 더 많다. 무기도 배가 넘는다. 만약 미군이 철수하고 북한이 적화통일하려고 도발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 그 물음엔 아무 말도 않더군요”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대해서도 북한과 맞서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더라구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미군철수 주장하는 좌파, 길거리 노숙자보다 더 불쌍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어요. 북한에서는 아이들한테 그렇게 가르칩니다” 김춘례 상위는 마지막까지 북한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제 초등학생 6명이 와서 서명을 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바로 옆에서 시위하는 대학생들(1일부터 이들 옆에서는 매일 좌파단체들의 주한민군철수 집회가 열리고 있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는 눈에 비친 대한민국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좌파들은 길거리 노숙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시위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녀가 답했다.
“한사람이라도 더 각성시키고 싶습니다. ‘북민전’에서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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