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北 요덕수용소 갇힌 우리 ‘숙자’ 구해주세요”
  • 관리자
  • 2011-08-03 09: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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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요덕수용소 갇힌 ‘통영의 딸’ 구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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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입수된 사진 북한 요덕수용소에 수감 중인 신숙자 씨(왼쪽)와 큰딸 혜원 씨(오른쪽), 작은딸 규원 씨(가운데)의 모습. 이 사진은 1991년 1월 작곡가 윤이상 씨가 신 씨 남편 오길남 씨에게 “다시 월북하라”고 종용하며 건넨 6장의 가족 사진 중 하나다. 통영현대교회 제공
 
“북에서 죽을 수는 없지요. 한 번이라도 고향땅을 밟고 숨을 거둬도 거둬야지요.”

지난달 28일 경남 통영시 서호동 통영여객선터미널 안 대합실.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 서명운동 및 북한인권 바로알기’ 전시회장에서 만난 신 씨의 초중학교 동창 4명은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기도했다. 신숙자 씨(69)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초등학교(45회)와 통영여중(9회)을 졸업한 ‘통영의 딸’이지만 기구한 운명으로 북한으로 갔다. 현재는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이날 행사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통영시협의회, 신 씨 구출운동에 불을 지핀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담임목사(49)와 교인들이 마련했다.

중2 때 단짝이었다는 김순자 씨(68)는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숙자’가 북한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면서 “만일 친구가 죽었다면 두 딸만이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느냐”며 울먹였다. 김 씨는 친구가 북한, 그것도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치를 떨었다. 초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이선자(68), 주길자(69), 주덕기 씨(67)는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조그만 키에 야무진 친구였다”며 포스터 속 친구 얼굴을 쓰다듬었다.

신 씨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1958년 마산간호학교로 진학해 통영 친구들과 떨어졌다. 1960년대 후반 간호사 파견 정책에 따라 독일로 갔다. 그곳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던 오길남 박사(69)를 만나 1975년 결혼했다. 슬하에 혜원 씨(35)와 규원 씨(33) 두 딸을 뒀다. 단란하던 가정은 1985년 남편 오 씨가 꾐에 빠지면서 풍파에 휘말렸다. 북한에 가면 교수직과 당시 교통사고로 다친 신 씨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며 북한 요원이 접근했다. 게다가 통영 출신 음악가 윤이상 씨와 재독(在獨)학자 송두율 씨 등의 적극적인 권유가 한몫을 했다. 신 씨는 “북한은 믿을 수 없다”며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남편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그해 북한으로 갔다.

이들은 외부와 차단된 채 3개월간 세뇌교육을 받았다. 이후 오 박사는 대남 흑색선전 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요원으로 배치됐다. 1년이 지났을 때 상부에서 오 박사에게 ‘독일에 유학 중인 남한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신 씨는 남편에게 “우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가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라는 지령에 협조하지 말고 도망치라. 내 딸들이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선 안 된다. 탈출에 성공하면 우리를 구출해주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우리가 죽은 줄로 알라”고 말했다. 결국 오 박사는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가족을 구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신 씨와 두 딸은 1987년 말 정치범수용소인 ‘요덕수용소’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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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학교 동창들 “제발 살아있길” 신 씨의 초중학교 동창인 김순자 이선자 주덕기 주길자 씨(왼쪽부터)가 경남 통영시 서호동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신 씨의 구명운동에 나선 모습. 통영=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탈출 후 독일에 숨어 살던 오 박사는 당시 북한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윤이상 씨를 만나 북한에 있던 가족 송환을 수차례 요청했다. 윤 씨는 1987년과 1988년 두 차례 가족 편지를 전해주기도 했다. 1991년에는 부인과 딸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와 가족사진 6장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윤 씨는 오 박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 다시 입북해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오 박사는 1992년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한 뒤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관련기관에 간절한 호소문을 보냈지만 반응이 시원찮았다. 오 박사는 통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후 현재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잊혀져 가던 신 씨 사연은 방 목사의 부인 소신향 씨(47) 덕분에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소 씨는 2009년 구국기도회(에스더기도운동)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특강을 듣던 중 신 씨 사연을 알게 됐다. 마침 북한인권단체(세이지코리아)가 주관하는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통영에서 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와 승낙했다. 전시회 본래 슬로건에다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5, 6월 전시회를 열면서 신 씨 모녀 구출운동에 불을 지폈다. 지난달 26일에는 경남 창원에서 경남포럼21과 함께 이와 관련한 강연회를 열었다.

통영을 중심으로 한 경남 일원에서는 신 씨 모녀 구출 서명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까지 서명자는 2만6000명. 통영에서는 전체 인구(14만 명)의 11.4%인 1만6000명이 서명했다. 방 목사는 ‘신숙자 모녀 생사확인 요청 및 구출 탄원서’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통일부 등에 보내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다. 방 목사는 “북한에는 인권유린 정도가 아니라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의를 보고 분연히 일어났던 한국 젊은이들은 침묵하고 있다”며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에 모든 분들이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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