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가족관계] 김정일 가계도
  • 관리자
  • 2010-05-21 15: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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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우상화는 김일성 주석 개인우상화에서 점차 가계우상화를 강화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식량난과 함께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김 주석의 유훈통치를 표방한 1997년 이후에는 이른바 '3대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우상화가 본격화됨으로써 가계우상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1997년 1년동안 북한의 총 건설실적은 82건으로 이중 현지지도 표지비, 말씀판 등 정치선전물 건립이 62건(75.6%)인데 비해 경제부문의 건설실적은 20건(24.4%)에 불과했다(통일원 발표). 정치선전물은 주로 김정일 현지지도 표지비, 김일성 현지교시 및 김정일 김정숙 현지말씀판, 김부자 혁명사적 표지비 등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총비서로 추대된 1997년 10월 한달동안 11개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김 국방위원장의 1인체제가 굳어지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숙에 대해서 '불멸의 백두여장군', '혁명의 어머니, 탁월한 정치활동가', '위대한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혁명투사' 등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김정숙모범 따라배우기 운동'이 진행된다.

김정숙 관련 기록영화 '어머님의 총소리 영원하리라'가 제작되었고 사진을 담은 우표와 우편엽서가 발행되고 있다. 그의 출생지 함북 회령시에는 김정숙혁명사적관이 있다.

그밖에 1996년 각 군의 소대단위 내무반에 이들 3인의 초상화를 한 장으로 인쇄한 120x40 cm 크기의 '3대 위인상' 부착되기 시작했고, 이을설 호위사령관은 '3대장군 잊지 못하네'라는 가요를 만들기도 했다. 1997년 12월에는 '김일성 현지교시-김정일 말씀-김정숙 말씀판이 조선중앙적십자병원에 내걸렸다.

행정구역과 학교 등의 이름을 가계우상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김정숙의 이름을 딴 행정구역과 학교가 가장 많다. 1981년 8월 양강도 신파군·읍을 김정숙군·읍으로 신파여자고등학교와 혜산제2사범대학을 김정숙여자고등중학교, 김정숙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1988년에는 함북 경성요양소와 평양에 탁아소를 건설, 김정숙요양소와 김정숙탁아소로 각각 명명됐으며, 평남 평성시에는 김정숙제1고등중학교가 있다.

1975년에 평양 제1사범대학을 김 주석의 부친 이름을 따 김형직사범대학으로, 1988년 8월에는 양강도 후창군·읍을 각각 김형직군·읍으로 바꿨다. 1990년대 들어 김 주석 숙부인 김형권의 이름을 빌려 양강도 풍산군·읍을 각각 김형권군·읍으로, 풍산군 파발고등중학교를 김형권고등중학교로 개명했다.

김 주석의 이름을 딴 북한 최고의 김일성종합대학이 있고, 김 국방위원장의 이름이 붙은 정일봉고등중학교가 1992년 개교했다. 이 학교는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밀영에 있는 학생수 120명의 미니학교다.

김 주석의 아우 김철주의 이름을 딴 김철주사범대학, 김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의 이름이 들어간 강반석유자녀대학과 강반석고등중학교가 있으며, 1994년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에 강반석탁아소가 건립되었다.

1994년 8월에는 김 주석의 조부 김보현의 이름도 교명으로 등장했다. 농업간부재교육대학의 김보현대학이라고 개칭한 것이다. 북한의 중앙인민위원회는 정령을 통해 김보현을 "일제 침략자들과 지주들을 반대하여 굴함없이 싸우면서 자손들을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투쟁에 내세우고 적극 도운 열렬한 애국자"라고 소개했다.

김보현은 1871년 8월 19일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오늘의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짓고 살다 1955년 9월 2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한 전형적인 촌로였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 가계우상화작업에 따라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와 함께 "봉건관료배와 외래침략을 반대하는 정신이 투철한 열렬한 애국자"로 추앙됐다.

김정숙의 동생 김기송도 우상화의 대상에 포함됐다. 1995년 8월 그의 동상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동안 김기송은 북한에서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는데 김일성 사후 김정숙 우상화 분위기에 편승해 부각되기 시작했다.

앞서 북한은 1995년 1월 중앙인민위 정령을 통해 회령고등중학교를 '김기송고등중학교'로 개칭하면서 그를 '김정숙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영웅적 위훈을 세운 소년혁명가' '항일아동단원들의 전형'으로 찬양했다.

심화되고 있는 가계우상화는 처음에는 역사 왜곡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은 우리 근세사를 김일성 가계(家系) 중심으로 변조하고 있다. 1860년대에는 침략군사기지, 상품시장기지 획득을 위해 미국이 침입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해 왔을 때는 김 주석의 증조부 김응우가 중심이 돼 셔먼호를 격침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해서 전민족이 일어섰던 3·1운동도 마치 김 주석의 어버지 김형직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처럼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즉 3·1운동은 "김형직 선생이 평양에서 애국청년들과 함께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며 "인민대중이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하는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함으로써 3·1운동을 가계우상화에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즉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을 부르주아계급으로 매도하고 민족대표들이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일성의 어버지 김형직의 주도로 평양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곱의 어린이에 지나지 않은 김일성이 3·1운동에 참가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1997년 3월에는 김형직이 조직 지도했다는 '조선국민회' 결성 80주년을 맞아 중앙연구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그를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김정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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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공식 부인)은 본명이 이영숙이며, 국내에서는 '김영숙'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정숙(金正淑, 1917~1949)
김성애(金聖愛, 1924~)

성혜림(成蕙琳, 1937~) 김정남(金正男·남, 1971~)
이영숙(李英淑, 1947~) 김설송(金雪松·여, 1974~)
고영희(高英嬉, 1950~) 김정철(金正哲·남, 1981~) 김정운(金正雲, 남) 김일순(여)

김경희(金敬姬, 1946~)
장성택(張成澤, 1946~) 장금송(張琴松·여, 1977~) 장수길(張秀吉, 1990~)

김광섭(金光燮, 1952~)
김경진(金敬珍, 1952~) 김충민(金忠民·남, 1981~) 김동민(金東民·남, 1983~)

김평일(金平一, 1954~)
김순금(金順琴, 1956~) 김은송(金恩松·여, 1981~) 김인강(金仁剛·남, 1983~)

김영일(金英一, 1955~2000)
염춘월(1965~) 김성강(金成剛·남, 1983~) 김명강(金明剛·남, 1987~) 김형강(金炯剛·남, 1990~)

※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 장금송은 2006년 8월 프랑스에서 사망
 
<북한전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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