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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딸’ 여중-대학 친구들이 기억하는 신숙자 씨
- 관리자
- 2011-09-28 09:16:36
- 조회수 : 3,893
“가난에도 책벌레 우등생… 노점 홀어머니 위해 간호학교 진학”
‘통영의 딸 신숙자 씨’의 중학교, 대학 친구들은 신 씨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숙자가 꼭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신 씨는 여중, 여고 시절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어여쁜 소녀 모습 그대로였다.
○ “옛날 집 그대로 남아있는데…”
26일 통영에서 만난 김순자 씨(68·경남 통영시 도천동)는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숙자가 북한에 있다니 믿을 수 없다”며 “북한이 죄 없는 우리 친구와 두 딸을 빨리 돌려보내 줘야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쏟아냈다. 그는 6월 10일 오전 시장에 다녀오다 통영현대교회에서 시작한 ‘통영의 딸, 신숙자 구출운동’ 포스터에서 오래된 친구 이름을 발견하고 집에서 졸업 앨범을 뒤적였다. 50여 년 만에 꺼내본 앨범 속 신 씨와 포스터 속 인물은 같은 사람이었다. 바로 중 2때 짝꿍이던 신 씨였다.
김 씨는 “숙자 집이 우리 집과 가까워 등교할 때마다 같이 갔다”며 “사진을 확인한 뒤 숙자가 살았던 서호동 74번지를 찾아갔더니 옛날 집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숙자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숙자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도 항상 외동딸에게 깔끔한 교복을 입혔다”며 “숙자가 살아오면 옛날 등굣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동기생 190여 명 중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던 숙자는 공부를 잘해서 마산간호학교로 갔는데 그 후에 왜 북한으로 갔는지 안타까울 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통영여중에 다닐 당시 학년 때마다 3일씩 한산도에 해양훈련을 갔다”며 “당시 배를 타고 가면서 같이 수영하고 장난치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고 옛일을 회상했다.
○ “할 일 스스로 했던 야무진 아이”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녀일 때 숙자는 달랐어요. 먼저 철이 들었다고 할까. 말수가 적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는 야무진 아이였죠.”
신 씨와 통영여중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김연 씨(68·인천 연수구)는 “숙자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속 깊은 아이였다”며 “집에 놀러 가면 숙자가 늘 책을 읽거나 밀린 학교 공부를 하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김 씨에 따르면 신 씨, 김 씨, 조월순 씨(사망) 등 세 명이 단짝이었다는 것. 김 씨는 “숙자 어머니가 서호동 아침시장과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을 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숙자 성격은 늘 밝았다”며 “변변한 책상이 없어 숙자가 늘 밥상을 펴 놓고 공부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나는 당시 통영여고에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숙자는 어느 날 ‘마산간호학교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해 조금 의아스러웠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빨리 돈을 벌어 홀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 “간호학교 때도 학구적”
신 씨와 당시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현 마산대 간호과)를 함께 다닌 유덕자 씨(69·여·경남 창원시)는 “숙자는 말수가 적고 학구적인 친구”라며 “심성도 무척 착했다”고 말했다.
유 씨는 2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담한 키에 피부가 어찌나 뽀얗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신 씨의 학창 시절 모습을 전했다.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직하다 1999년 2월 창원대방초등학교에서 명예퇴직한 유 씨는 “신문에 나온 사진을 보니까 얼굴은 옛날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며 “몸이 아팠다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유 씨는 “숙자가 살아서 가족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정말 좋겠다”며 “며칠 전 마산대 서명 현장에서 남편 오길남 박사를 처음 만났는데 그분이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유 씨는 22일 마산대에서 후배들이 추진한 신숙자 씨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1961년 2월 25일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모두 29명. 당시 간호학교는 국가에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중학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특차로 뽑아 공부를 시켜주는 식으로 운영됐다고 한다. 유 씨는 “오 박사가 자신이 쓴 책에서 가족에 대한 회한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많은 국민들이 신 씨 모녀 귀환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통영의 딸 신숙자 씨’의 중학교, 대학 친구들은 신 씨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숙자가 꼭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신 씨는 여중, 여고 시절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어여쁜 소녀 모습 그대로였다.
○ “옛날 집 그대로 남아있는데…”
26일 통영에서 만난 김순자 씨(68·경남 통영시 도천동)는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숙자가 북한에 있다니 믿을 수 없다”며 “북한이 죄 없는 우리 친구와 두 딸을 빨리 돌려보내 줘야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쏟아냈다. 그는 6월 10일 오전 시장에 다녀오다 통영현대교회에서 시작한 ‘통영의 딸, 신숙자 구출운동’ 포스터에서 오래된 친구 이름을 발견하고 집에서 졸업 앨범을 뒤적였다. 50여 년 만에 꺼내본 앨범 속 신 씨와 포스터 속 인물은 같은 사람이었다. 바로 중 2때 짝꿍이던 신 씨였다.
김 씨는 “숙자 집이 우리 집과 가까워 등교할 때마다 같이 갔다”며 “사진을 확인한 뒤 숙자가 살았던 서호동 74번지를 찾아갔더니 옛날 집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숙자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숙자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도 항상 외동딸에게 깔끔한 교복을 입혔다”며 “숙자가 살아오면 옛날 등굣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동기생 190여 명 중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던 숙자는 공부를 잘해서 마산간호학교로 갔는데 그 후에 왜 북한으로 갔는지 안타까울 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통영여중에 다닐 당시 학년 때마다 3일씩 한산도에 해양훈련을 갔다”며 “당시 배를 타고 가면서 같이 수영하고 장난치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고 옛일을 회상했다.
○ “할 일 스스로 했던 야무진 아이”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녀일 때 숙자는 달랐어요. 먼저 철이 들었다고 할까. 말수가 적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는 야무진 아이였죠.”
22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대에서 열린 ‘신숙자 씨 구출 서명운동’ 현장에 서 신 씨 남편 오길남 박사가 공개한 신숙자 씨와 두 딸의 사진. 창원=연합뉴스
김 씨는 “나는 당시 통영여고에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숙자는 어느 날 ‘마산간호학교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해 조금 의아스러웠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빨리 돈을 벌어 홀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 “간호학교 때도 학구적”
신 씨와 당시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현 마산대 간호과)를 함께 다닌 유덕자 씨(69·여·경남 창원시)는 “숙자는 말수가 적고 학구적인 친구”라며 “심성도 무척 착했다”고 말했다.
유 씨는 2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담한 키에 피부가 어찌나 뽀얗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신 씨의 학창 시절 모습을 전했다.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직하다 1999년 2월 창원대방초등학교에서 명예퇴직한 유 씨는 “신문에 나온 사진을 보니까 얼굴은 옛날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며 “몸이 아팠다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유 씨는 “숙자가 살아서 가족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정말 좋겠다”며 “며칠 전 마산대 서명 현장에서 남편 오길남 박사를 처음 만났는데 그분이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유 씨는 22일 마산대에서 후배들이 추진한 신숙자 씨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1961년 2월 25일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모두 29명. 당시 간호학교는 국가에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중학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특차로 뽑아 공부를 시켜주는 식으로 운영됐다고 한다. 유 씨는 “오 박사가 자신이 쓴 책에서 가족에 대한 회한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많은 국민들이 신 씨 모녀 귀환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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