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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美인천상륙작전에 -화들짝-中지원요청
- 관리자
- 2010-06-22 09:55:59
- 조회수 : 6,283
1950년 10월 마오쩌뚱에 '출병 요청' 서한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한국전 초기 중국의 군사지원 제안을 거절하던 북한의 김일성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황이 급격히 불리하게 돌아가자 10월 1일 다급하게 중국에 '직접 출동'을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이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뚱 당시 중국 국가 주석에게 친필로 보낸 A4 용지 2장 분량의 '출병 요청 서한'에 따르면 북한은 인천상륙 작전을 통해 미군이 한국전에 개입,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크게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되는 이 서한에서 김일성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우리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며 "적들이 패전을 거듭해 남조선 최남부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 최후 결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고 미국의 군사적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었다"고 자평했다.
이 서한의 원본은 중국 당안관(문서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으며 사본이 단둥(丹東)의 '항미원조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 서한은 말미에 '1950년 10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이라고 기재,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장 김일성과 부위원장 박헌영의 공동 명의로 발송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한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자기의 위신을 만회하고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본래의 목적을 기어이 달성하기 위해 태평양 방면의 육해공군을 거의 전부 동원, 9월 15일 대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면서 전황이 참으로 엄중해졌고 전선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불리한 조건이 형성됐다"고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뒤집혔음을 시인했다.
김일성은 이어 "적은 약 1천대의 각종 항공기로 매일 주야를 구분하지 않고 전선과 후방 할 것 없이 폭격을 감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그에 대항할 항공기가 없는 조건하에서 적들이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각 전선에서 100여 대씩 편성된 항공부대의 엄호하에 적의 기계화부대들이 활동하고 비행기가 저공비행으로 우리 부대들을 다수 살상하고 있다"며 "적의 항공기들이 우리의 후방 교통, 운수, 통신 시설들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바람에 적들의 기동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반면 우리 인민군 부대들의 기동력은 약화마비됐다"고 실토했다.
"이로 인해 '남반부' 주둔 인민군 부대들이 '북반부'와 차단되고 남반부 전선에 있던 부대들이 고립, 포위돼 무기와 탄약 등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수세에 몰린 다급한 전황을 설명한 김일성은 "서울이 완전히 점령된다면 적은 38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며 지금과 같은 불리한 조건이 계속된다면 적의 침입은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일성은 "운수.공급 문제를 해결하고 기동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항공력이 필요하다"며 "우리에게는 준비된 비행사들이 없다"고 전투기 지원의 절박함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내놓지 않기 위해 새롭게 부대를 조직, 훈련하고 남반부 내 10여만 인민군 부대들을 결집시키는 등 전 인민을 총무장시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것"이라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밝혔다.
김일성은 그러나 "적들이 우리의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침공한다면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전황이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했다.
김일성은 그러면서 "우리는 당신(마오쩌둥)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적군이 38선을 침공하면 약속했던 대로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필요하다"고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김일성의 군사지원 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은 "참전의 이익은 매우 크며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클 것"이라며 같은 해 10월 19일 3만 명을 파병한 데 이어 수일 뒤 15만 명을 추가 투입해 같은 달 25일 한국군.미군과 첫 교전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했다.
우드로윌슨센터는 옛 소련의 극비문서를 분석, 지난 16일 발표한 '한국전 기간 북.중 갈등' 자료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5월 중국을 방문, 남침 계획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뚱으로부터 군사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 한동안 중국과 미묘한 갈등을 빚었다고 소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전 발발 이후에도 중국의 거듭된 군사지원 제안을 거절했으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수세에 몰리면서 1950년 10월 1일 소련의 스탈린까지 나서 "현재 최선의 방안은 중국군의 지원을 받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이날 밤 주북한 중국대사를 불러 중국군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이 서한은 당시 중국대사를 통해 마오쩌뚱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pjk@yna.co.kr
http;//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한국전 초기 중국의 군사지원 제안을 거절하던 북한의 김일성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황이 급격히 불리하게 돌아가자 10월 1일 다급하게 중국에 '직접 출동'을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이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뚱 당시 중국 국가 주석에게 친필로 보낸 A4 용지 2장 분량의 '출병 요청 서한'에 따르면 북한은 인천상륙 작전을 통해 미군이 한국전에 개입,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크게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되는 이 서한에서 김일성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우리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며 "적들이 패전을 거듭해 남조선 최남부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 최후 결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고 미국의 군사적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었다"고 자평했다.
이 서한의 원본은 중국 당안관(문서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으며 사본이 단둥(丹東)의 '항미원조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 서한은 말미에 '1950년 10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이라고 기재,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장 김일성과 부위원장 박헌영의 공동 명의로 발송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한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자기의 위신을 만회하고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본래의 목적을 기어이 달성하기 위해 태평양 방면의 육해공군을 거의 전부 동원, 9월 15일 대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면서 전황이 참으로 엄중해졌고 전선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불리한 조건이 형성됐다"고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뒤집혔음을 시인했다.
김일성은 이어 "적은 약 1천대의 각종 항공기로 매일 주야를 구분하지 않고 전선과 후방 할 것 없이 폭격을 감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그에 대항할 항공기가 없는 조건하에서 적들이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각 전선에서 100여 대씩 편성된 항공부대의 엄호하에 적의 기계화부대들이 활동하고 비행기가 저공비행으로 우리 부대들을 다수 살상하고 있다"며 "적의 항공기들이 우리의 후방 교통, 운수, 통신 시설들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바람에 적들의 기동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반면 우리 인민군 부대들의 기동력은 약화마비됐다"고 실토했다.
"이로 인해 '남반부' 주둔 인민군 부대들이 '북반부'와 차단되고 남반부 전선에 있던 부대들이 고립, 포위돼 무기와 탄약 등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수세에 몰린 다급한 전황을 설명한 김일성은 "서울이 완전히 점령된다면 적은 38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며 지금과 같은 불리한 조건이 계속된다면 적의 침입은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일성은 "운수.공급 문제를 해결하고 기동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항공력이 필요하다"며 "우리에게는 준비된 비행사들이 없다"고 전투기 지원의 절박함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내놓지 않기 위해 새롭게 부대를 조직, 훈련하고 남반부 내 10여만 인민군 부대들을 결집시키는 등 전 인민을 총무장시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것"이라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밝혔다.
김일성은 그러나 "적들이 우리의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침공한다면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전황이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했다.
김일성은 그러면서 "우리는 당신(마오쩌둥)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적군이 38선을 침공하면 약속했던 대로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필요하다"고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김일성의 군사지원 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은 "참전의 이익은 매우 크며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클 것"이라며 같은 해 10월 19일 3만 명을 파병한 데 이어 수일 뒤 15만 명을 추가 투입해 같은 달 25일 한국군.미군과 첫 교전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했다.
우드로윌슨센터는 옛 소련의 극비문서를 분석, 지난 16일 발표한 '한국전 기간 북.중 갈등' 자료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5월 중국을 방문, 남침 계획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뚱으로부터 군사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 한동안 중국과 미묘한 갈등을 빚었다고 소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전 발발 이후에도 중국의 거듭된 군사지원 제안을 거절했으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수세에 몰리면서 1950년 10월 1일 소련의 스탈린까지 나서 "현재 최선의 방안은 중국군의 지원을 받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이날 밤 주북한 중국대사를 불러 중국군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이 서한은 당시 중국대사를 통해 마오쩌뚱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p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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