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北 김정은 시대]“지구최강 골퍼 숨지다”-동아일보
  • 관리자
  • 2011-12-22 11:00:24
  • 조회수 : 3,269
■ 김씨일가 ‘스포츠 우상화’ 실태와 외신반응

미국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ESPN 홈페이지는 19일 김정일의 사망을 두고 ‘가장 위대한 골퍼의 사망’이라고 풍자했다(위) ESPN 홈페이지, 2008년 11월 2일 김정일(가운데)이 조선 인민군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사진. 야후스포츠는 김정일이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북한 대표팀 감독에게 일일이 작전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가운데)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TV가 2007년 3월 17일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영도의 길에 함께 계시여’에서 김정일이 권총 사격 연습을 하는 장면을 방영했다(아래) 연합뉴스

축지법을 쓰는 할아버지는 낙엽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아버지는 처음 나간 골프 라운드에서 홀인원 11개를 했다. 아들은 3세 때부터 총을 잡고 명중사격을 했다. 북한이 그동안 밝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황당무계한 운동 실력이다.

3대에 걸친 김씨 일가의 놀라운 운동 감각은 김일성 때부터 시작된다. 1974년 12월 26일 조선중앙방송 보도에 따르면 김일은 축지법을 쓰고 가랑잎 한 장으로 대하를 건넜다. 북한 인민학교용 국어 교과서엔 김일성이 ‘백두산과 만주에서 축지법을 쓰시어 일제를 족쳤다’라고 적혀 있다. ‘김일성 장군은 구름을 타고 와서 못된 놈을 혼내준다’는 황당한 내용까지 나온다.

17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은 만능 스포츠맨으로 불릴 만하다. 미국 스포츠 전문 케이블채널 ESPN이 북한 방송을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1994년 평양골프장(파 72·7700야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프를 쳤다. 스코어는 38언더파 34타.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홀인원을 11번이나 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18홀 최저타 기록은 59타다. 통산 메이저 최다 우승(18회)에 빛나는 ‘황금 곰’ 잭 니클라우스(미국)가 평생 한 홀인원이 20차례 정도다. ESPN은 19일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골퍼가 사망했다’며 비꼬았다.

원형중 이화여대 사회체육학과 교수(SBS골프 해설위원)는 “파4홀의 전장이 5m라면 가능하다”며 “정식 코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야후스포츠는 김정일이 처음 친 볼링에서 300점 만점을 기록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당시 북한 대표팀 감독에게 작전과 선수들의 움직임까지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도 다방면에서 뛰어난 운동 실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주 종목은 사격과 농구다. 북한이 2009년 작성해 배포한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에 대한 위대성 자료’에는 “청년대장 동지는 이미 3세 때부터 총을 잡고 명중사격을 하시었다”고 적혀 있다. 자료에 따르면 김정은은 2009년 5월 자동소총 사격을 했는데 1초 당 3발씩 쏘며 100m 밖에 매달아 놓은 전등알들과 그 뒤에 매달아 놓은 병들을 다 한 번에 맞혔다. 또 표적지에 총을 20발 쏴 모두 10점짜리 동그라미 안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이병준 사격 국가대표 후보선수 감독은 “단발로 쏴서 100m 밖 전등알을 맞히는 건 가능하다. 20발 쏴 모두 10점 맞히는 것도 가능하다”면서도 “자동소총으로 1초간 3발을 점사로 쏴 전등 3개를 맞히는 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아버지만큼이나 농구광이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그는 미국프로농구 광팬으로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토니 쿠코치,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스위스 유학 시절 김정은의 급우였던 스위스인 즈마오 미카엘로는 “김정은에게 농구는 세상의 전부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은은 ‘기쁨조’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여성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NKSIS)에 따르면 김정은은 기쁨조 90명을 선발했는데 이때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는가’를 물어봤다. 미녀 경호원 10여 명은 인민보안성 태권도 특설반에서 특채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에 광적인 관심을 보이며 우상화의 수단으로 삼았던 북한의 세습 철권통치 속에서도 북한 스포츠의 국제 경쟁력은 오랜 침체기에 허덕이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선수 육성과 투자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어지간한 국제대회 출전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했다. 게다가 스포츠에도 주체사상을 적용해 독자성을 강조하는 폐쇄정책은 퇴보를 부채질했다. 북한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에서 종합 4위에 오른 뒤 아시아 톱10에서도 밀려나 2006년 도하 대회에서 16위,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 12위에 그쳤다.

북한은 1996년 독자적인 농구 규칙을 만들었다. 당시 김정일은 박진감과 흥미를 강조하며 농구 규칙을 바꿨다. 3점슛이 클린슛이거나 6.70m 라인 밖에서 던진 공이 들어갈 경우 4점으로 쳤다. 하프라인 넘어 골을 성공시키면 5점, 자유투 실패 시 1점 감점을 줬다. 1999년에는 극적인 역전 승부를 유도하기 위해 경기 종료 2초 전부터의 득점은 모두 8점으로 인정하도록 규칙을 바꾸기도 했다. 스포츠 용어도 ‘주체식’ 표기법을 사용해 국제 공용어를 사용하는 우리와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면 복싱의 잽을 ‘톡톡치기’, KO승을 ‘완전 넘어뜨리기’로 표현한다. 농구의 리바운드는 ‘튄공잡기’, 덩크슛은 ‘꽂아넣기’다. 결국 북한 스포츠의 마이웨이는 고립과 쇠락을 가속화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