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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황태자로 53년, 王으로 17년… 核 주무르다 빈손으로 갔다
- 관리자
- 2011-12-20 09: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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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70년
조작된 출생, 지도자 수업 - 1941년 소련서 태어났지만 우상화 위해 출생지·연도 바꿔…
김일성의 재혼에 반발, 계모 김성애를 어머니라 안불러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7년여간 북한을 철권 지배했다. 후계자로 확정된 1974년부터 치면 37년 동안이다.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국제 사회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도 3대 세습이란 봉건적 행태를 보여 전 세계의 비웃음을 샀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 하바로프스크 부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항일 빨치산 활동 중이던 김일성·김정숙이었다. 이름도 소련식인 '유라'였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1980년대 초부터,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한다. 김일성의 출생연도(1912년)와 끝자리를 맞추기 위해 생년을, 우상화를 위해 출생지를 조작한 것이다.
젖먹이 시절 김정일은 김일성의 호위병·전령병인 전문섭·조명록·백학림의 등에 업혀 자랐다. 이들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시대에도 군 요직에 중용됐다. 김정일이 북한땅을 밟은 건 해방 후인 1945년 11월 말이었다. 김정숙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함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항에 들어왔다. 두 달 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건당·건군·건국' 작업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김정일(사진 왼쪽)이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로이터
6·25 전쟁이 터지자 김정일은 숙부 김영주를 따라 자강도 강계와 만포, 중국 지린(吉林)시 교외로 피란을 갔다가 1952년 봄 평양으로 돌아와 그해 11월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학원 4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김일성은 수상관저 전화 교환수로 김정숙의 시중을 들던 김성애와 재혼했다. 김정일은 생모의 비서가 계모가 된 것에 반발하며 김성애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았다.
김정일은 1957년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해 이 학교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을 지냈다. 2~3학년 땐 진학할 대학을 고르기 위해 소련과 동유럽 지역을 돌아보기도 했으나 결국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1960년 9월)를 택했다. 북한 최고 교수들이 김정일을 위한 지도교수 그룹을 결성, 본격적인 지도자 수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70년대 초반 후계자 수업을 받던‘청년 김정일’이 한 군부대를 방문, 권총을 겨누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 겪으며 김일성 우상화에 집착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그해 6월 노동당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의 지도원 신분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조직지도부에서 당·정·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김정일은 1967년 당의 사상 사업을 총괄하는 선전선동부의 과장이 됐다. 영화·연극·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일은 중앙당 사무실을 비우고 평양대극장과 조선영화촬영소에 살다시피 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확정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조직지도부장인 삼촌 김영주와의 권력투쟁이 치열했고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 된 계모 김성애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은 빨치산 원로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김일성주의’ 공포 등 김일성 우상화에 매진했으며 이를 통해 당·정·군 조직 내에 후계체제(유일지도 체제)를 확립했다. 결국 김정일은 1973년 9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이듬해 2월 당 정치위원이 됨으로써 후계자로 확정됐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전반적인 국가·당 사업은 김정일이 관장하고 외교와 경제는 김일성이 챙기는 형국이 됐다.
이어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4월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오르며 계승 절차는 마무리됐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삼년상을 치른 김정일은 1997년 10월 당 총비서에 오른 데 이어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됐다. 김정일 정권의 출범이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맞이하고 있다.
"등소평이 옳았소" 한때 개방정책에 관심보여
김정일은 1995~1998년 ‘고난의 행군’ 시절 주민 100만명 이상을 굶겨 죽였지만 ‘선군정치’를 앞세워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2000년 들어서는 외부 환경이 좋았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썼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냉각됐던 북·중 관계도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訪中)을 계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2000년 5월 집권 후 첫 방중 길에 올라 중국 지도부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직접 알렸다. 당시 베이징에서 김정일은 “등소평 (개방)노선이 옳았다”고 했다. 그 해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에는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한 조명록 차수가 평양과 워싱턴을 상호 방문했다. 2001년 1월 다시 방중한 김정일은 상하이를 방문해 “천지개벽”이란 말을 남겼다. 이후 김정일은 개방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2년 7월 성과급제 등 일부 시장경제를 도입한 7·1 경제개선조치를 발표한 데 이어 개성공단·금강산관광 개발 등에 속도를 냈다.
그러나 김정일은 유화 정책 뒷면에 핵개발과 대남 도발을 숨기고 있었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2차 연평해전을 일으켜 우리 해군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9년 6월 1차 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다. 김정일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다시 열어 대규모 경제 협력 등에 합의했다. 남한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 지원 등을 계속 받아내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퍼주기’ 대북 정책을 중단할 조짐을 보이자 우리측 당국자를 추방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쉴새 없이 쏟아냈다. 2008년 7월에는 금강산에서 우리 관광객이 북한군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2002년 평양에서 만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사진)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 악화·후계 불안에 천안함·연평도 등 강경도발
김일성 사망 이후 철옹성이던 김정일의 독재는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2개월여 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휠체어를 타고 공개활동에 나섰지만 2009년 들어서는 만성신부전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신부전으로 인한 요독이 뇌를 건드려 환각증세를 보일 정도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북한 내부에서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후계 논의가 이뤄졌고 김정일은 2009년 1월 삼남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정일 건강 악화와 김정은 후계 불안은 2010년 3월 우리 해군 장병 46명의 목숨을 빼앗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이어졌다. 흔들리는 체제 단속을 위해 군부를 더욱 중용했다. 이런 위기감을 이용해 2010년 9월 44년 만에 당 대표자회를 열어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그 후 1년 3개월여 만에 김정일은 눈을 감았다. 만 70년 10개월 1일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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