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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망명한 쿠바 ‘한반도통’ “北생활 9년간…”-동아닷컴
- 관리자
- 2013-01-21 10:09:10
- 조회수 : 3,684
美 망명한 쿠바 ‘한반도통’ “北생활 9년간…”
《 한평생 북한과 한국을 넘나들었던 ‘한반도통’ 쿠바 여성이 지난해 미국에 망명해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쿠바 내에서 한국어를 하며 생업을 유지했던 쿠바인은 10명이 채 안 되는데 미국 망명자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바인 여성 피게레도 마이라 씨(58)는 라울 카스트로 정부가 내국인 해외여행 제한을 완화한 첫날인 14일 마이애미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났다. 그는 “지난해 7월 29일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으며 현재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다”며 “먼저 미국에 와 살고 있는 큰아들 부부, 네 살짜리 손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고 망명 이유를 밝혔다.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평양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일했던 그는 2005년 문을 연 KOTRA 아바나 무역관 개관을 위한 현지 직원 1호로 채용돼 망명 직전까지 일해 왔다. 현재 KOTRA 마이애미 무역관장인 조영수 초대 아바나 무역관장은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업무 수완이 없었다면 아바나 무역관은 개소하기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마이라 씨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취직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한국을 위해 살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 그는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인 듯 쿠바에 대한 비판은 삼간 채 담담하게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등지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음이 아파 한 달 동안 잠도 못 잤다. 지금도 가끔 잠을 설친다. 쿠바에 부모님을 두고 왔다. 아버지는 10년 전 전립샘암에 걸려 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였다. 평생 가꿔 온 집도, 친구도, 일터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인생의 황혼을 앞둔 나에겐 무엇보다 아들 식구와 손녀가 중요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유였다.”
―언제, 어떻게 미국 망명을 결심했나.
“지난해 7월 쿠바 정부의 허락을 받아 2주일 체류 일정으로 미국에 왔다. 며느리가 아파 며칠 더 상태를 보려고 그달 29일 워싱턴에 있는 쿠바 이익대표부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다시 쿠바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화가 났다. 아픈 가족을 더 돌봐주고 가겠다는 마음을 거절당했다. 그래서 미국에 주저앉기로 결심했다.”
―미국에는 처음 온 거였나.
“세 번째였다. 2010년과 2011년 8월 마이애미의 KOTRA 무역관 행사를 돕기 위해 왔었다. 당시에도 2주에서 한 달 동안 체류했다.”
―아들 부부는 언제 미국에 왔나.
“첫째 아들 호스마이(1982년생)는 쿠바에 왔던 멕시코 여성과 결혼해 2004년 미국으로 나왔다. 둘째 아들 호스에(1985년생)도 지난해 11월 미국에 합류했다. 그 역시 결혼한 뒤 유럽 국가로 유학을 떠났다가 스페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북한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쿠바와 북한은 지금도 사회주의 형제 나라다.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학생 교류가 활발했다. 1976년 아바나종합대 어문학부를 졸업했고 그해 북한에 가 2년 동안 김일성종합대에서 조선어 연수를 했다. 그 2년이 나의 모든 인생을 바꿔놓았다. 연수 후 쿠바로 돌아와 외교부 통역센터에서 북한 손님들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이후 1980∼1982년, 1985∼1990년 두 차례 만 7년 동안 평양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양국 외교 업무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두 번째 체류할 때는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야간 과정을 다녀 북한의 문화와 역사, 언어 등으로 준(準)박사 학위(한국의 석사학위 정도)를 받았다.”
―북한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북한에 들어갈 때마다 중국을 거쳤는데 몇 년 사이에 중국은 매번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북한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기 힘들어했다. 여자로서 제일 섭섭한 것이 하나 있다. 첫아들은 1982년 평양에서 낳았고 둘째 호스에는 1985년 쿠바에서 낳아 데리고 갔다. 두 번째 대사관 근무 6년 동안 아이들을 친할머니처럼 돌봐준 북한 여성이 있었다. 1990년 쿠바로 돌아올 때 할머니는 슬픔이 역력했지만 북한 사람들 앞에서 감히 울지 못했다.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을 위해서 울면 안 됐다. 외국인과 가깝게 지내서도 안 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쿠바에 와서 편지를 하려고 했지만 북한 당국자들은 집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사관 직원이면 북한 체험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너무 심심했다. 쿠바 사람들은 저녁 나들이를 많이 하는데 북한은 춥고 저녁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일했지만 자기 집에 초청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대사관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백두산과 금강산에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 대신 전기와 수도 등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풍족했다. 외교관 전용 상점에서 물품을 충분히 공급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북한 직원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종합대에 다닐 때는 재미난 일이 없었나.
“기숙사에서 방을 같이 쓰던 ‘명희’라는 친구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주 재미있는 여학생이었다. 내 또래였는데 애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는 종종 ‘오늘 새 남자친구와 올 테니 창문으로 보고 나중에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보고 ‘좋다’ ‘나쁘다’ 이야기를 해줬다.”
―명희 말고 북한 친구는 또 없나.
“연수까지 모두 9년 동안 북한에 살았지만 북한 친구가 하나도 없다. 당시 쿠바에서 여러 학생이 북한에 갔다. 러시아 중국 독일 알바니아 등에서도 학생들을 보냈다. 그런데 국가별로 따로따로 별도의 반에서 공부를 했다. 기숙사는 외국인과 북한 학생이 한 방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룸메이트는 나를 감시하는 것이 주 임무였던 것 같다. 명희 말고 다른 학생들은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는 북한반에서, 나는 쿠바반에서 공부했고 그나마 알 만하면 바뀌었다. 1985년에 북한에 갔을 때 명희와 몇몇 친구를 찾으려 했지만 포기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그들이 어디 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북한은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다.”
―한국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쿠바로 다시 돌아오니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했고 그들의 원조로 살아온 쿠바는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졌다. 쿠바 정부는 외국인 관광산업을 통해 달러벌이에 나섰고 한국인들이 하나둘 쿠바에 들어왔다. 1990년 한국의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나 남미에 정착한 한인들을 말하는 ‘애니깽’을 취재했다. 나는 그들의 통역을 맡았다. 김태용 영화감독이 들어와 기록 영화를 찍을 때 동행했다. 김 감독은 당시 짐을 쿠바에 놓고 가서 1년 동안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왔을 때 돌려줬다. 이들의 소개로 사업가 배우 학자 기자 등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1995년에는 소설가 한수산 선생도 만났고 그와 애니깽을 취재하러 멕시코도 함께 다녀왔다. 한국 여행사와 무역회사 아바나 사무소 일을 보는 동안 알게 된 한국인이 수백 명은 된다(웃음).”
―KOTRA 아바나 무역관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2005년 7월 말 무역관 개소를 위해 현지에 부임한 조영수 초대 관장이 나를 개관 멤버로 채용했다. 모진 고생 끝에 9월에 개소하면서 호텔과 자동차 임대, 회의 준비, 스페인어 통역, 쿠바인 섭외, 행정지원 등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관광이나 사업을 위해 현지에 들어와 돈이 떨어지거나 사고를 당한 한국인들을 구조하는 일종의 외교관 ‘영사업무’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보람이 있었다.”
―한국은 몇 번 와 봤나.
“모두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95년 쿠바에 살고 있는 애니깽들을 데리고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 뒤 쿠바 음악인, 영화감독을 데리고 방문했다. 2008년 마지막 방문 땐 당시 홍기화 KOTRA 사장의 초청을 받았다. 아바나 무역관을 열면서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바나 무역관에 대해 관심이 컸던 그는 ‘사장으로서 마지막 일은 마이라를 한국으로 초청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약속을 지켰다.”
―북한과 한국을 비교한다면….
“내가 보기에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은 비슷하다. 문화도 언어도 논리도 같다. 거리에 인도를 만든 것이나 나무를 심는 것도 비슷하다. 인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닮았다. 하지만 번창한 한국의 경제는 쇠락해가는 북한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정치제도도 달랐다. 다 알지 않느냐.”
―한국은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조언을 해준다면….
“남북한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이 나면 결국 보통 국민들과 아이들만 죽고 다친다는 경험이 있지 않나. 잘사는 남한 국민들이 못 사는 북한의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당국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망명 후 미국에서 어떻게 지내나.
“마이애미 시 외곽에서 첫째 아들 집에 같이 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이 너무 힘들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살아왔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KOTRA 아바나 무역관에서 일했다. 빨리 일하고 싶다.”
―조국과 거기에 남은 동포들을 위해 하고픈 말은….
“쿠바 정부가 주민들의 해외여행을 더 자유롭게 허용하길 바란다.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쿠바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비자를 잘 내주면 좋겠다. 고향 친구들이 나처럼 해외로 나간 가족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다.”
마이애미=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피게레도 마이라 씨가 14일 미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첫째 아들 호스마이 씨와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호스마이 씨는 1982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났다. 마이애미=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쿠바인 여성 피게레도 마이라 씨(58)는 라울 카스트로 정부가 내국인 해외여행 제한을 완화한 첫날인 14일 마이애미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났다. 그는 “지난해 7월 29일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으며 현재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다”며 “먼저 미국에 와 살고 있는 큰아들 부부, 네 살짜리 손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고 망명 이유를 밝혔다.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평양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일했던 그는 2005년 문을 연 KOTRA 아바나 무역관 개관을 위한 현지 직원 1호로 채용돼 망명 직전까지 일해 왔다. 현재 KOTRA 마이애미 무역관장인 조영수 초대 아바나 무역관장은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업무 수완이 없었다면 아바나 무역관은 개소하기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마이라 씨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취직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한국을 위해 살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 그는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인 듯 쿠바에 대한 비판은 삼간 채 담담하게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등지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음이 아파 한 달 동안 잠도 못 잤다. 지금도 가끔 잠을 설친다. 쿠바에 부모님을 두고 왔다. 아버지는 10년 전 전립샘암에 걸려 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였다. 평생 가꿔 온 집도, 친구도, 일터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인생의 황혼을 앞둔 나에겐 무엇보다 아들 식구와 손녀가 중요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유였다.”
―언제, 어떻게 미국 망명을 결심했나.
“지난해 7월 쿠바 정부의 허락을 받아 2주일 체류 일정으로 미국에 왔다. 며느리가 아파 며칠 더 상태를 보려고 그달 29일 워싱턴에 있는 쿠바 이익대표부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다시 쿠바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화가 났다. 아픈 가족을 더 돌봐주고 가겠다는 마음을 거절당했다. 그래서 미국에 주저앉기로 결심했다.”
―미국에는 처음 온 거였나.
“세 번째였다. 2010년과 2011년 8월 마이애미의 KOTRA 무역관 행사를 돕기 위해 왔었다. 당시에도 2주에서 한 달 동안 체류했다.”
―아들 부부는 언제 미국에 왔나.
“첫째 아들 호스마이(1982년생)는 쿠바에 왔던 멕시코 여성과 결혼해 2004년 미국으로 나왔다. 둘째 아들 호스에(1985년생)도 지난해 11월 미국에 합류했다. 그 역시 결혼한 뒤 유럽 국가로 유학을 떠났다가 스페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북한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쿠바와 북한은 지금도 사회주의 형제 나라다.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학생 교류가 활발했다. 1976년 아바나종합대 어문학부를 졸업했고 그해 북한에 가 2년 동안 김일성종합대에서 조선어 연수를 했다. 그 2년이 나의 모든 인생을 바꿔놓았다. 연수 후 쿠바로 돌아와 외교부 통역센터에서 북한 손님들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이후 1980∼1982년, 1985∼1990년 두 차례 만 7년 동안 평양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양국 외교 업무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두 번째 체류할 때는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야간 과정을 다녀 북한의 문화와 역사, 언어 등으로 준(準)박사 학위(한국의 석사학위 정도)를 받았다.”
―북한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북한에 들어갈 때마다 중국을 거쳤는데 몇 년 사이에 중국은 매번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북한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기 힘들어했다. 여자로서 제일 섭섭한 것이 하나 있다. 첫아들은 1982년 평양에서 낳았고 둘째 호스에는 1985년 쿠바에서 낳아 데리고 갔다. 두 번째 대사관 근무 6년 동안 아이들을 친할머니처럼 돌봐준 북한 여성이 있었다. 1990년 쿠바로 돌아올 때 할머니는 슬픔이 역력했지만 북한 사람들 앞에서 감히 울지 못했다.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을 위해서 울면 안 됐다. 외국인과 가깝게 지내서도 안 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쿠바에 와서 편지를 하려고 했지만 북한 당국자들은 집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사관 직원이면 북한 체험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너무 심심했다. 쿠바 사람들은 저녁 나들이를 많이 하는데 북한은 춥고 저녁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일했지만 자기 집에 초청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대사관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백두산과 금강산에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 대신 전기와 수도 등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풍족했다. 외교관 전용 상점에서 물품을 충분히 공급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북한 직원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종합대에 다닐 때는 재미난 일이 없었나.
“기숙사에서 방을 같이 쓰던 ‘명희’라는 친구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주 재미있는 여학생이었다. 내 또래였는데 애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는 종종 ‘오늘 새 남자친구와 올 테니 창문으로 보고 나중에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보고 ‘좋다’ ‘나쁘다’ 이야기를 해줬다.”
―명희 말고 북한 친구는 또 없나.
“연수까지 모두 9년 동안 북한에 살았지만 북한 친구가 하나도 없다. 당시 쿠바에서 여러 학생이 북한에 갔다. 러시아 중국 독일 알바니아 등에서도 학생들을 보냈다. 그런데 국가별로 따로따로 별도의 반에서 공부를 했다. 기숙사는 외국인과 북한 학생이 한 방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룸메이트는 나를 감시하는 것이 주 임무였던 것 같다. 명희 말고 다른 학생들은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는 북한반에서, 나는 쿠바반에서 공부했고 그나마 알 만하면 바뀌었다. 1985년에 북한에 갔을 때 명희와 몇몇 친구를 찾으려 했지만 포기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그들이 어디 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북한은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다.”
―한국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쿠바로 다시 돌아오니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했고 그들의 원조로 살아온 쿠바는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졌다. 쿠바 정부는 외국인 관광산업을 통해 달러벌이에 나섰고 한국인들이 하나둘 쿠바에 들어왔다. 1990년 한국의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나 남미에 정착한 한인들을 말하는 ‘애니깽’을 취재했다. 나는 그들의 통역을 맡았다. 김태용 영화감독이 들어와 기록 영화를 찍을 때 동행했다. 김 감독은 당시 짐을 쿠바에 놓고 가서 1년 동안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왔을 때 돌려줬다. 이들의 소개로 사업가 배우 학자 기자 등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1995년에는 소설가 한수산 선생도 만났고 그와 애니깽을 취재하러 멕시코도 함께 다녀왔다. 한국 여행사와 무역회사 아바나 사무소 일을 보는 동안 알게 된 한국인이 수백 명은 된다(웃음).”
―KOTRA 아바나 무역관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2005년 7월 말 무역관 개소를 위해 현지에 부임한 조영수 초대 관장이 나를 개관 멤버로 채용했다. 모진 고생 끝에 9월에 개소하면서 호텔과 자동차 임대, 회의 준비, 스페인어 통역, 쿠바인 섭외, 행정지원 등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관광이나 사업을 위해 현지에 들어와 돈이 떨어지거나 사고를 당한 한국인들을 구조하는 일종의 외교관 ‘영사업무’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보람이 있었다.”
―한국은 몇 번 와 봤나.
“모두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95년 쿠바에 살고 있는 애니깽들을 데리고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 뒤 쿠바 음악인, 영화감독을 데리고 방문했다. 2008년 마지막 방문 땐 당시 홍기화 KOTRA 사장의 초청을 받았다. 아바나 무역관을 열면서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바나 무역관에 대해 관심이 컸던 그는 ‘사장으로서 마지막 일은 마이라를 한국으로 초청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약속을 지켰다.”
―북한과 한국을 비교한다면….
“내가 보기에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은 비슷하다. 문화도 언어도 논리도 같다. 거리에 인도를 만든 것이나 나무를 심는 것도 비슷하다. 인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닮았다. 하지만 번창한 한국의 경제는 쇠락해가는 북한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정치제도도 달랐다. 다 알지 않느냐.”
―한국은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조언을 해준다면….
“남북한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이 나면 결국 보통 국민들과 아이들만 죽고 다친다는 경험이 있지 않나. 잘사는 남한 국민들이 못 사는 북한의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당국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망명 후 미국에서 어떻게 지내나.
“마이애미 시 외곽에서 첫째 아들 집에 같이 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이 너무 힘들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살아왔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KOTRA 아바나 무역관에서 일했다. 빨리 일하고 싶다.”
―조국과 거기에 남은 동포들을 위해 하고픈 말은….
“쿠바 정부가 주민들의 해외여행을 더 자유롭게 허용하길 바란다.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쿠바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비자를 잘 내주면 좋겠다. 고향 친구들이 나처럼 해외로 나간 가족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다.”
마이애미=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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