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9회]
  • 관리자
  • 2010-06-04 11: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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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중심으로

그렇듯 내가 하던 일은 이런저런 시비를 당하는 것 말고는 큰 무리 없이 잘 진척되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었고, 내 나이도 예순을 넘겼다. 다행히도 주체사상 선전사업은 잘되었다. 수많은 외국손님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주체과학원에서 주체사상에 관한 학슬토론을 벌이는 한편, 북한이 자랑하는 곳을 둘러보았다. 중요 대표단들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접견하고 오찬을 베풀었다. 해외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진 나는 그들이 가져다주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해외여행을 자주 하면서 세계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가정생활도 안정되어 행복하고 단란했다. 맏딸과 둘째딸은 공부를 잘했으며 셋째 딸도 대학입학 시험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들도 공부를 잘했고, 나와는 달리 사교성과 붙임성이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김경희와 장성택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았으며,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나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도 그만하면 좋은 편이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살벌해졌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권력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아웅산 폭파사건이 북이 저지른 또 하나의 테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북한의 권력중심에서는 간부들의 이동이 단행되었다. 국제비서로 있던 김영남이 외교부장 겸 부총리로 자리를 옮기고, 외교부장으로 있던 허담이 대남관계 부서인 통일전선부장 겸 비서로 들어왔으며, 국제비서 자리는 김용순이 부부장에서 승진하여 맡게 되었다. 김영남은 자리이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허담의 부인도 남편을 국제비서로 승진시키지 않고 대남사업을 맡긴데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국제부는 당내에서 조직부, 선전부 다음으로 힘이 셌으며, 이 세부서의 부부장들에게는 주택을 중앙당 청사 안이나 다름없는 곳에 제공하고 호위국 보초가 경비를 섰으며, 승용차도 2인이 1대를 쓰는 다른 부서의 부부장과는 달리 1인 1대였다. 병원도 평양에서 시설과 의료진이 가장 좋다는 봉화병원을 이용했다. 국제부에는 김경희가 과장으로 있고 김용순이 부부장으로 있었는데, 김용순이 김경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결국 김영남을 몰아내고 비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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