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9회]
  • 관리자
  • 2010-06-04 10: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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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방승옥 동무에게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당신을 버리고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당신이 걱정하며 머리 숙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처럼 인정 없는 사람도 막 미칠 것 같소. 할아버지에게 욕을 먹고 자기의 자주성을 지켜 항의해보려고 복도 구석에 누워 있던 지현이, 호의를 표시하며 환심을 사려고 장난감을 가지고 막 달려오던 어린 지성이를 생각할 때마다 막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소.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 바라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그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은 응당하다고 생각하오.

가슴만 아플 뿐 사죄할 길이 없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소. 만일 조선노동당이 지금의 비정상적인 체제를 버리고 개혁·개방을 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나는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이 아픈 가슴을 이겨내며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라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1997년 2월 17일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서
황장엽

유서를 쓰고 나니 무거운 마음이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이제 살아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슬픔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북에서 가져온 원고를 좀 더 빨리 정리하느라고 애를 썼다. 원고를 읽어보니 남몰래 써둔 것이라 문맥이 통하지 않은 것이 많고 고쳐 써야 할 데가 적지 않았다. 나는 일단 아주 잘못된 것만 우선적으로 고치고, 또 그 중에서 하나만이라고 제대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체철학의 기본문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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