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7회]
- 관리자
- 2010-06-04 11:00:03
- 조회수 : 1,599
김일성의 이런 성격에 대해 나는 어느 빨치산 간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빨치산 투쟁 때는 믿을 만한 사람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요.” 김정일은 김일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 교묘하게 일을 해나갔으며, 또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측근들과 술판을 자주 벌이고 위력을 과시했다.
이 술판으로 많은 외화를 탕진했으며, 도처에 특각(별장)을 짓고 사냥터를 만들었다. 김정일이 벌이는 술자리는 상상을 초월한 난장판이었다. 김정일이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오늘부터 너는 중앙당 위원회 위원이다.”라고 선언해버리면 그대로 되는 것이며, “아무개는 철직이다.”라고 선포하면 그대로 집행되었다. 주지육림이란 말은 바로 이런 술자리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너무도 한심하여 더 이상 회상하고 싶지도 않다.
김정일이 당 기구를 즉흥적으로 마구 확대하자, 자연히 마구잡이 정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김정일은 비밀경찰을 강화하여 자신을 헐뜯은 혐의가 있다고 밀고 되면 가차 없이 체포하여 처단했다. 한 예로 1948년 당시만 해도 김대에 전임 당일군이 대학당 위원장 1명 그리고 선전지도원 및 통계원이 각각 1명씩 있었으나, 김정일이 실권을 잡고부터는 개별 학부에까지 전임 당비서를 두게 되어 대학의 전임 당일군의 수는 50명이 넘었다.
더구나 사회언전부와 국가보위부도 대학에 부서를 만들어 상주했다. 김정일은 당 조직을 통해 자기 생일을 즈음하여 진상품을 올리는 운동을 벌이게 했는데, 대학에서도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선생과 학생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진상품이 너무 많이 들어와 결국 측근들에게 나눠주는 촌극을 벌이기까지 했다. 김정일은 또 각급 당 조직을모체로 하여 충성의 외화벌이 조직을 만들어 도·시·군당에 외화벌이 과업을 주고, 그곳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당에 바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내가 김일성의 서기로 있던 시절에는 지금 본청사라고 하여 김정일 혼자 쓰고 있는 한 채에 중앙당 일군들이 다 들어가 있었으나, 그가 당의 주인으로 된 다음부터는 본 청사를 호화롭게 꾸며 혼자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 규모의 청사를 10개동이나 더 지었다. 또 대남사업부서들의 청사도 대규모로 짓도록 했으며, 중앙당 일군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렸다. 나는 김정일의 당 조직 불리기와 상관없이 주체사상의 선전 강도를 높여 나갔다.
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에는 세계적으로 조직된 주체사상소조를 지도하기 위한 전문 지도과를 신설했고, 김일성 생일을 전후하여 격년으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나는 주체사상 국제세미나가 열리면 조선대표단 단장으로서 참가했다. 그러면서 주체사상의 진리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개인우상화와 북한의 허위선전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세미나에 참가한 학자들에게 그 진수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를 고심했다.
그래서 조총련에서 온 학자들에게 주체철학의 진수를 인식시키기 위해 숨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각국의 주체사상 대표단에게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1979년 4월 인도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토론회 때 일본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한 오가미 켄이찌에게는 조선의 주체사상을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실정에 맞게 일본화 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또 각각의 민족은 자기 나라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주체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러 자리에서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조했다고 해서 각국 대표들이 내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렸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주장하는 것은 허위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국손님들과의 담화에서 김정일이 요구하는대로 선전을 하면서, 동시에 참된 주체철학의 원리를 인식시키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1979년 10월,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이 제의에 따라 세계를 겨냥하여 주체사상의 선전을 더욱 강화하고 외국에 조직된 소조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 내에 ‘주체사상연구소’를 비공개 부서로 설치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나를 그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14년여의 긴 세월 동안 일해 온 김대를 떠나는 게 몹시 서운했다. 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지 못한 채 떨어져서 근무해야 한다는 것도 가슴 아팠다. 김대는 내 마음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짐을 챙겨 철수하던 날, 나는 총장실에서 14년간의 희비를 떠올리며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이 술판으로 많은 외화를 탕진했으며, 도처에 특각(별장)을 짓고 사냥터를 만들었다. 김정일이 벌이는 술자리는 상상을 초월한 난장판이었다. 김정일이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오늘부터 너는 중앙당 위원회 위원이다.”라고 선언해버리면 그대로 되는 것이며, “아무개는 철직이다.”라고 선포하면 그대로 집행되었다. 주지육림이란 말은 바로 이런 술자리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너무도 한심하여 더 이상 회상하고 싶지도 않다.
김정일이 당 기구를 즉흥적으로 마구 확대하자, 자연히 마구잡이 정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김정일은 비밀경찰을 강화하여 자신을 헐뜯은 혐의가 있다고 밀고 되면 가차 없이 체포하여 처단했다. 한 예로 1948년 당시만 해도 김대에 전임 당일군이 대학당 위원장 1명 그리고 선전지도원 및 통계원이 각각 1명씩 있었으나, 김정일이 실권을 잡고부터는 개별 학부에까지 전임 당비서를 두게 되어 대학의 전임 당일군의 수는 50명이 넘었다.
더구나 사회언전부와 국가보위부도 대학에 부서를 만들어 상주했다. 김정일은 당 조직을 통해 자기 생일을 즈음하여 진상품을 올리는 운동을 벌이게 했는데, 대학에서도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선생과 학생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진상품이 너무 많이 들어와 결국 측근들에게 나눠주는 촌극을 벌이기까지 했다. 김정일은 또 각급 당 조직을모체로 하여 충성의 외화벌이 조직을 만들어 도·시·군당에 외화벌이 과업을 주고, 그곳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당에 바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내가 김일성의 서기로 있던 시절에는 지금 본청사라고 하여 김정일 혼자 쓰고 있는 한 채에 중앙당 일군들이 다 들어가 있었으나, 그가 당의 주인으로 된 다음부터는 본 청사를 호화롭게 꾸며 혼자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 규모의 청사를 10개동이나 더 지었다. 또 대남사업부서들의 청사도 대규모로 짓도록 했으며, 중앙당 일군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렸다. 나는 김정일의 당 조직 불리기와 상관없이 주체사상의 선전 강도를 높여 나갔다.
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에는 세계적으로 조직된 주체사상소조를 지도하기 위한 전문 지도과를 신설했고, 김일성 생일을 전후하여 격년으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나는 주체사상 국제세미나가 열리면 조선대표단 단장으로서 참가했다. 그러면서 주체사상의 진리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개인우상화와 북한의 허위선전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세미나에 참가한 학자들에게 그 진수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를 고심했다.
그래서 조총련에서 온 학자들에게 주체철학의 진수를 인식시키기 위해 숨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각국의 주체사상 대표단에게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1979년 4월 인도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토론회 때 일본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한 오가미 켄이찌에게는 조선의 주체사상을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실정에 맞게 일본화 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또 각각의 민족은 자기 나라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주체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러 자리에서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조했다고 해서 각국 대표들이 내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렸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주장하는 것은 허위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국손님들과의 담화에서 김정일이 요구하는대로 선전을 하면서, 동시에 참된 주체철학의 원리를 인식시키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1979년 10월,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이 제의에 따라 세계를 겨냥하여 주체사상의 선전을 더욱 강화하고 외국에 조직된 소조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 내에 ‘주체사상연구소’를 비공개 부서로 설치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나를 그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14년여의 긴 세월 동안 일해 온 김대를 떠나는 게 몹시 서운했다. 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지 못한 채 떨어져서 근무해야 한다는 것도 가슴 아팠다. 김대는 내 마음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짐을 챙겨 철수하던 날, 나는 총장실에서 14년간의 희비를 떠올리며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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