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5회]
- 관리자
- 2010-06-04 10: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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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주체철학을 완성하여 김일성을 세계혁명의 불멸의 지도자로 만들고 싶은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경제대국이나 군사대국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려면 엄청난 국력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적습니다.
그러니 주체사상을 발전시켜 사상의 대국이 되어 인류역사 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하고 또 김일성이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상식을 초월한 주관주의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김정일의 ‘김일성주의’ 선포를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의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의 필독문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노작 다음에 김일성의 노작이 올랐다. 나는 이미 1960년대 말에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간중심의 철학을 정립했으나,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대학에 돌아와서도 함구무언하고 내 이론을 선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라고 선포하게 되자, 한편으로는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철학을 선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대학에서 주체철학을 조금씩이나마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김영춘이나 이국선을 철학연구에 끌어들이게 된 것도 김정일이 ‘김일성주의’를 선포함으로써 가능했다. 김영춘과 이국선은 나의 이론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수재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도움을 얻어가며 많은 글을 썼다. 게다가 연구분야를 경제학으로도 넓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의 일면성을 시정하고 인간중심의 가치법칙을 밝히려고 했다. 이때부터 중앙당 비서들도 이론문제에 의문이 들거나 걸리는 게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바쁜 대외활동을 펼쳤다. 그즈음 김일성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용원이 선전부에서 당 역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 대신 선전부 이론선전과장이 된 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새롭게 주체철학이 발견되고 김정일 동지가 김일성주의를 제창하셨으니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써야 하는데, 의장동무께서 이 사업을 좀 지도해 주셔야겠습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오.”
나는 교과서를 다시 쓰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손도 모자랐다. 김대에는 김영춘과 이국선이 전부였고 그 밖의 학자들은 주체사상에 대해 우리에게 듣거나 발표된 문건을 읽은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9월 17일자 김일성 명의로 발표된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와 1974년 2월 19일자 김정일의 명의로 발표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만을 지침으로 하여 철학교과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또 내가 직접 쓴다고 해도 그 이론이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되기 전에는 쓸데없는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되어 교과서 집필은 시기상조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론선전과장은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쓰기로 한 것이 마치 당의 방침인 것처럼 말했다. 그의 말은 김정일이 승인을 했으니 곧 당의 방침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잔말 말고 교과서 집필을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주체사상을 발전시켜 사상의 대국이 되어 인류역사 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하고 또 김일성이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상식을 초월한 주관주의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김정일의 ‘김일성주의’ 선포를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의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의 필독문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노작 다음에 김일성의 노작이 올랐다. 나는 이미 1960년대 말에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간중심의 철학을 정립했으나,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대학에 돌아와서도 함구무언하고 내 이론을 선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라고 선포하게 되자, 한편으로는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철학을 선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대학에서 주체철학을 조금씩이나마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김영춘이나 이국선을 철학연구에 끌어들이게 된 것도 김정일이 ‘김일성주의’를 선포함으로써 가능했다. 김영춘과 이국선은 나의 이론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수재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도움을 얻어가며 많은 글을 썼다. 게다가 연구분야를 경제학으로도 넓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의 일면성을 시정하고 인간중심의 가치법칙을 밝히려고 했다. 이때부터 중앙당 비서들도 이론문제에 의문이 들거나 걸리는 게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바쁜 대외활동을 펼쳤다. 그즈음 김일성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용원이 선전부에서 당 역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 대신 선전부 이론선전과장이 된 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새롭게 주체철학이 발견되고 김정일 동지가 김일성주의를 제창하셨으니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써야 하는데, 의장동무께서 이 사업을 좀 지도해 주셔야겠습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오.”
나는 교과서를 다시 쓰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손도 모자랐다. 김대에는 김영춘과 이국선이 전부였고 그 밖의 학자들은 주체사상에 대해 우리에게 듣거나 발표된 문건을 읽은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9월 17일자 김일성 명의로 발표된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와 1974년 2월 19일자 김정일의 명의로 발표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만을 지침으로 하여 철학교과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또 내가 직접 쓴다고 해도 그 이론이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되기 전에는 쓸데없는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되어 교과서 집필은 시기상조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론선전과장은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쓰기로 한 것이 마치 당의 방침인 것처럼 말했다. 그의 말은 김정일이 승인을 했으니 곧 당의 방침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잔말 말고 교과서 집필을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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