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3회]
- 관리자
- 2010-06-04 10: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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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후에 안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문서정리실에 있던 김일성의 처남이 실장과 짜고 내가 하던 일을 헐뜯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은 새로운 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처남을 좋아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이미 자신의 글을 써주는 집단인 ‘216호실’을 거느리고 있었다. ‘216’이란 자기 생일날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이 집단은 주로 기자출신들과, 글을 전문으로 쓰지만 학자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정일은 내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주의 철학과는 달리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원리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나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주체철학을 발표하는 걸 주저하기 때문에 당분간 발표될 것 같지 않으니 철학연구는 뒤로 미루고 우선 대학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럼, 황 선생께서 그동안 연구한 모든 자료를 나한테 전부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3년 반 동안 쓴 주체철학과 관련된 글들을 챙겨 김정일에게 보내주었다. 그 글 속에는 이미 김일성에게 보고한 것도 들어 있었다. 그 후 나는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고 그동안 김일성의 지시로 철학연구를 해온 사실을 아는 당 책임비서는 나에게 대학은 제1부총장에게 맡기고 철학연구를 계속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당 책임비서는 중앙당 조직부원이었으나 김정일이 직접 파견한 자였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철학연구를 계속하기로 하고 도서관에 나가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그즈음 나는 대학에서 으뜸가는 수재로 소문나 철학전문가인 김영춘과 경제전문가인 이국선을 조수로 맞아들여 내 뒤를 받쳐줄 후배들을 키우시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동무들의 머리는 나보다 열 배는 더 낫다.” 당시 나는 김일성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이 확고하지는 않더라고 불안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자식들의 교육에는 관심을 기울이며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김일성의 자식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등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주었다. 또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를 위해서는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 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나도 이따금 중앙당에 근무하는 김경희를 찾아가 강의를 해주었다. 김정일과 김경희는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양쪽 모두 우리 부부를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애를 썼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우리 부부처럼 교육에 복무하는 사람은 주인집 가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걸 사양하면서 양쪽과 두루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평일에게는 『삼국지』를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중국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의 예를 들어 목숨을 부지하려면 평양을 떠나 멀리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김정일은 내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주의 철학과는 달리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원리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나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주체철학을 발표하는 걸 주저하기 때문에 당분간 발표될 것 같지 않으니 철학연구는 뒤로 미루고 우선 대학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럼, 황 선생께서 그동안 연구한 모든 자료를 나한테 전부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3년 반 동안 쓴 주체철학과 관련된 글들을 챙겨 김정일에게 보내주었다. 그 글 속에는 이미 김일성에게 보고한 것도 들어 있었다. 그 후 나는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고 그동안 김일성의 지시로 철학연구를 해온 사실을 아는 당 책임비서는 나에게 대학은 제1부총장에게 맡기고 철학연구를 계속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당 책임비서는 중앙당 조직부원이었으나 김정일이 직접 파견한 자였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철학연구를 계속하기로 하고 도서관에 나가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그즈음 나는 대학에서 으뜸가는 수재로 소문나 철학전문가인 김영춘과 경제전문가인 이국선을 조수로 맞아들여 내 뒤를 받쳐줄 후배들을 키우시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동무들의 머리는 나보다 열 배는 더 낫다.” 당시 나는 김일성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이 확고하지는 않더라고 불안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자식들의 교육에는 관심을 기울이며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김일성의 자식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등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주었다. 또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를 위해서는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 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나도 이따금 중앙당에 근무하는 김경희를 찾아가 강의를 해주었다. 김정일과 김경희는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양쪽 모두 우리 부부를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애를 썼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우리 부부처럼 교육에 복무하는 사람은 주인집 가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걸 사양하면서 양쪽과 두루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평일에게는 『삼국지』를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중국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의 예를 들어 목숨을 부지하려면 평양을 떠나 멀리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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