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8회]
  • 관리자
  • 2010-06-04 10: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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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일성의 처남이 내 제자였었기 때문에 그가 김용원은 싫어해도 나를 반대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당시 문서 정리 실에서는 김일성 처남의 비호 아래 젊은 서기들이 실장과 부실장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분쟁은 결국 김일성이 세포회의에 직접 참가해 자기 처남의 편을 들어 실장과 부실장을 새로 임명하면서 끝이 났다. 나는 김일성에게 부실장을 지도원으로 강직시켜 계속 조수로 쓰겠다고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도 김일성의 처남을 중심으로 뭉친 젊은 서기들은 여전히 조수를 몰아붙였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나를 선생으로 대접을 했지만 돌아서면 헐뜯고는 했다. 아마도 내가 김일성의 문건을 좌지우지 하여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나는 그런 것에는 무딘 편이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놔두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것이 아닌 것 같았던 그들의 반대가 날이 갈수록 나의 새로운 철학적 원리를 구현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사업을 상당히 진척시키고 있었다.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든가, 「사회발전의 기본법칙」, 「인생관」등 여러 편의 글과 유물론과 변증법을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개작한 글도 썼다. 나는 김일성에게 연구 성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소식이 없어 수행하는 기술서기에게 물어봤더니, 계속 가방에 놓고는 다니는데 읽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철학교육을 받지 못한 김일성으로서는 나의 새로운 철학원리에 기초한 글들을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적 원리에 대한 인식을 돕기 위해 변증법이나 유물론을 좀 더 쉽게 해설해주겠다고 김일성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철학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 우선 정치적인 문제를 해명하는 데 힘을 기울여달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다시 주체철학에 매달렸다. 1972년 여름 김일성이 함께 휴가를 떠나자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문서 정리 실 서기들과 함께 김일성을 수행하여 여름휴가를 떠났다.

여름휴가가 끝나자 9월이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직후의 어느 날, 일본 “마이니찌” 신문사에서 김일성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주제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조선노동당의 대내외 정책’이었다. 김일성은 먼저 서면으로 답변을 주고 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 서면답변은 내가 작성했다. 1972년 9월 17일, 새로운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나의 글이 「우리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활자화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최초로 주체사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사람 중심의 사회역사원리에 기초한 조선노동당의 대내외 정책을 밝혔다. 이 글이 나가자 반응이 매우 좋았으나,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반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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