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7회]
  • 관리자
  • 2010-06-04 10: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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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헤겔의 논리학을 다시 펼쳐보았다. 소제목만 봐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특장노트를 읽어보자,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공부할 시간을 내지 못해 고심하던 지난날과 달리 자유로운 시간을 얼마든지 갖게 되자 얼마나 행복한지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6개월 동안 옆에서 총을 쏴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여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때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헤매다가도 첫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하룻밤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뿌옇게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길이 훤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우주의 끝이 보이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 해 가을 나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미 말을 못했다. 그러나 감정은 아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둘째누이가 오자 눈물을 흘리는 걸 봤다. 불쌍한 딸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었던 게 그것밖에는 없었으리라. 아버지의 일생은 유교도덕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한 인간의 깨끗한 삶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67년 대홍수로 집이 물에 잠겼을 때도 아버지는 남들을 걱정했고, 내가 당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지방으로 쫓겨 갈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자. “원래 벼슬하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런 각오도 없이 어떻게 벼슬을 한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향년 89세였다. 산소자리가 신통치 않아 결국 어머니 묘에 합장을 했다. 나는 장례를 마치던 날 저녁, 달천에 있는 휴양소로 돌아왔다. 새로운 철학원리를 정식화하고 체계화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철학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달천은 구월산 기슭에 위치한 곳이라 꿩과 노루가 많았다. 한번은 운전기사가 사냥을 가서 잠깐 사이에 꿩 15마리를 잡아온 적도 있었다.

김일성 부부도 처남과 아이들을 데리고 달천 근처의 별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날 김용원이 밤에 노루사냥을 나갔다가 김일성의 처남을 만났다. 당시 김일성의 처남은 김대 경제학부를 나와 중앙당 문서정리실(서기실)에 있었는데, 김용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용원은 아무 역할도 못하면서 공연히 총장을 따라와 밤에 노루사냥만 하고 돌아다닙니다.” 김일성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김영주에게 김용원을 당장 소환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여 김용원은 평양으로 돌아가고, 나는 서기실 부실장만을 데리고 있다가 그 해 말 평안북도에 있는 연풍휴양소로 장소를 옮겼다. 그것은 김일성이 황해도 달천은 전화걸기가 힘들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연풍휴양소는 연풍저수지가 있는 곳으로, 김일성의 휴양각이 있고 또 중앙당 간부들이 휴양하는 휴양각도 있었으며 평양과 직통 정부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래서 1972년부터는 연풍휴양소에 나가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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