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3회]
  • 관리자
  • 2010-06-04 10: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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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집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수해로 집을 잃은 선생들을 찾아가 위로하면서, 밤늦도록 학생들과 함께 수해복구 작업에 나서야 했다. 김일성은 수해복구에 동원된 종합대학 학생들의 작업현장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만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다. 그해 11월 말, 김일성은 수해복구 사업을 총화(토의)하는 회의 때도 나를 부르지 않고 제1부총장을 불렀다. 나는 닥쳐올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겁이 많았지만 두려움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든 게 단념되고 각오가 새로워지면서 이상하게도 대담해지곤 했다.

나는 김일 부수상의 말처럼 이론적인 문제는 이론적으로 풀기로 하고,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운명을 바꾸려는 의도보다 내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고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도 거의 안자고 먹지도 않은 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내는 내 건강과 내 오기를 걱정했다. 그러나 모든 걸 각오한 나는 덤덤했다. 마음을 비우니 대학에 나가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나는 집보다는 대학 기숙사에서 더 자주 잤는데, 그때는 학생들과 함께 식사하거나 청소도 같이 하고 밤에는 보일러공들과 함께 불도 땠다. 기숙사를 돌아보고 청소가 안 되었으면 학생들을 꾸중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걸레를 들고 화장실도 청소하고 학생들의 더러운 신발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총장실로 돌아와 새벽까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를 풀기 위해 사색에 잠기거나 글을 썼다.

중앙당 과학교육부장과 조직부 대학지도과장을 비롯한 중앙당 검열팀이 대학을 집중적으로 검열한 후 총장인 나를 비판하기 위해 대학 당 확대회의를 열었다. 나는 자기비판을 했으며, 교원들도 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 회의에는 당원인 학생들도 상당수 참석하고 있었다. 한번은 나에 대한 비판이 한창 고조되고 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철학과 5학년 학생인 대학 학생위원장이 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 우리 총장선생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이러한 옹호는 당시 분위기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연구생이 나를 맹렬히 비판하자, 다시 그 연구생을 비판하는 여성연구생도 있었다. “동무는 총장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이제 와서 비판하다니 양심이 있는 사람인가요?” 나는 그들이 내 편을 들어주어 좋다기보다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물론 용감한 학생들은 내가 알기로 성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대학에서도 열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 걱정하면서, 나는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좀체 길이 보이지 않았다. 확대회의가 열리면 나는 으레 비판을 받았고, 또 자기비판을 했다. 돕는 학생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어느 덧 겨울이 되었다. 하루는 밤에 총장실에서 문제를 풀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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