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1회]
- 관리자
- 2010-06-04 10:46:39
- 조회수 : 1,728
나는 당으로는 대학 당 부위원장이었고 행정직책으로 철학강좌장일 뿐만 아니라 대학 과학연구 부장이었다. 과학연구부장은 연구원장과 함께 대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직책이었다. 당시는 부총장 직책이 없던 때여서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총장과 당 위원장 다음가는 힘있는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컸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비판은 나로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철학이나 경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학이나 생물학에까지 스탈린의 영향이 막강한 여건에서, 철학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숭배가 단결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학문이나 연구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때의 내 믿음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 모든 것을 정치투쟁에 복종시키고 있었다. 나로서도 이렇게 나가다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도구로 전락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 정도의 권한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대학에서 내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또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문제에도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치에서 도피하는 것이 유리한 가 불리한가 하는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다가, 중앙당학교로 가라고 하던 당 간부부의 권고를 듣지 않고 김일성대학으로 온 것이 문득 후회되기도 했다. 남로당파는 숙청되었으나, 소련파와 연안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소련당의 개인숭배 비판 노선을 등에 업고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학 내에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학자들 중에는 숙청당한 남로당을 동정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꽤 많은 연안파 계열 학자들도 비판하는 쪽에 섰다. 김두봉이 연안파를 대표했다. 그는 언어학자로서 학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연히 김일성을 반대하는 소련파인 박창옥과 연안파인 최창익 간의 연합세력과 연계를 갖게 되었다.
당 중앙검열위원회에서는 수시로 대학에 나와 학자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들은 학교에 나와서는 나를 꼭 만나보고 갔는데, 총장이나 당 비서의 동향에 대해서도 은밀히 파악하려 들었다. 나는 그때 복잡한 정치투쟁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는 하나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이 이끄는 연합세력이 김일성을 정면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살벌한 기운이 북한 전역에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이자 상업상인 윤공흠과 직업동매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 당 위원장 홍락응 등이 중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학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사상검토회의로 들끓었다. 이 사상검토로 많은 학자들이 희생당했다. 은밀히 도는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대학 교수들 가운데 김일성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쓴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상검토를 거치지도 않고 비밀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컸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비판은 나로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철학이나 경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학이나 생물학에까지 스탈린의 영향이 막강한 여건에서, 철학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숭배가 단결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학문이나 연구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때의 내 믿음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 모든 것을 정치투쟁에 복종시키고 있었다. 나로서도 이렇게 나가다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도구로 전락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 정도의 권한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대학에서 내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또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문제에도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치에서 도피하는 것이 유리한 가 불리한가 하는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다가, 중앙당학교로 가라고 하던 당 간부부의 권고를 듣지 않고 김일성대학으로 온 것이 문득 후회되기도 했다. 남로당파는 숙청되었으나, 소련파와 연안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소련당의 개인숭배 비판 노선을 등에 업고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학 내에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학자들 중에는 숙청당한 남로당을 동정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꽤 많은 연안파 계열 학자들도 비판하는 쪽에 섰다. 김두봉이 연안파를 대표했다. 그는 언어학자로서 학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연히 김일성을 반대하는 소련파인 박창옥과 연안파인 최창익 간의 연합세력과 연계를 갖게 되었다.
당 중앙검열위원회에서는 수시로 대학에 나와 학자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들은 학교에 나와서는 나를 꼭 만나보고 갔는데, 총장이나 당 비서의 동향에 대해서도 은밀히 파악하려 들었다. 나는 그때 복잡한 정치투쟁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는 하나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이 이끄는 연합세력이 김일성을 정면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살벌한 기운이 북한 전역에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이자 상업상인 윤공흠과 직업동매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 당 위원장 홍락응 등이 중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학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사상검토회의로 들끓었다. 이 사상검토로 많은 학자들이 희생당했다. 은밀히 도는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대학 교수들 가운데 김일성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쓴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상검토를 거치지도 않고 비밀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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