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9회]
- 관리자
- 2010-06-04 10:45:57
- 조회수 : 1,619
소련파와 연안파의 숙청회오리
학교가 평양으로 나오면서 정치정세도 매우 복잡해졌다. 1953년 모스크바에 유학중일 때 나는 남로당 지도자들인 박헌영, 이승엽 도당을 숙청한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고, 당시 그곳에서도 사상검토회의가 진행되었다. 나는 당에서 주장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집작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정적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1954년 백송리에서도 박헌영, 이승엽 도당의 남은 해독을 청산하기 위한 사상검토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대학이 평양으로 나온 뒤로 또 다시 사상검토회의가 열렸다. 대개 사상검토를 하는 방법은 모든 당원들이 예외 없이 당에 대한 개인의 충성도 측면에서 자기비판을 한 다음 상호비판을 진행하고, 특히 문제가 된 자들의 결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955년까지는 주된 공격대상이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이었다. 그래서 월북한 학자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북한출신 학자들이 평소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월북학자들에게 복수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월북한 남쪽출신 학자들은 순진하고 아첨기가 없었으나, 북한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들을 당에 충실한 존재로 자처하면서 실력에서 달리는 부분을 정치적 기반의 우월성으로 보충하려 했다.
사정이 그러니 자연히 사상검토의 헤게모니는 북한출신 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나는 남쪽출신 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남로당 계열과 조금이라도 연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구원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철학강좌 선생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그 고비를 넘겼다. 희생당한 선생은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지목된, 원산 덕원에 있는 독일계 수도원 사람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숙청 회오리에 말려들었다.
그는 학식이 높아 내가 좋아하던 선생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어느 날 그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우리 곁을 떠났는데, 그에게는 평안북도 출신의 잘 생긴 아내와 그 사이에 낳은 아이까지 있었다. 그가 잡혀간 뒤 나름대로 알아보니 그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밀경찰에 체포당한 뒤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은 그때까지 없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의 명예를 위해 여기에 이름을 밝혀두고 싶다.
그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있었다는 김진구였다. 철학강좌에는 비밀경찰의 끄나풀이 있었고 다른 강좌에도 있었는데, 이들은 내가 김진구 선생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끄나풀들은 김진구 선생이 나에게 아첨을 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감싼다고 비방하며 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의 간첩혐의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리에 그토록 충실한 사람이 간첩으로서 북에 잠입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비판당하자, 김일성은 그 기회를 잡아 당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소련계 파벌을 집중 공격했다. 그저 단순한 파벌적 인맥관계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개인숭배 비판에 동조하는 인텔리들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학교가 평양으로 나오면서 정치정세도 매우 복잡해졌다. 1953년 모스크바에 유학중일 때 나는 남로당 지도자들인 박헌영, 이승엽 도당을 숙청한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고, 당시 그곳에서도 사상검토회의가 진행되었다. 나는 당에서 주장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집작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정적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1954년 백송리에서도 박헌영, 이승엽 도당의 남은 해독을 청산하기 위한 사상검토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대학이 평양으로 나온 뒤로 또 다시 사상검토회의가 열렸다. 대개 사상검토를 하는 방법은 모든 당원들이 예외 없이 당에 대한 개인의 충성도 측면에서 자기비판을 한 다음 상호비판을 진행하고, 특히 문제가 된 자들의 결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955년까지는 주된 공격대상이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이었다. 그래서 월북한 학자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북한출신 학자들이 평소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월북학자들에게 복수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월북한 남쪽출신 학자들은 순진하고 아첨기가 없었으나, 북한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들을 당에 충실한 존재로 자처하면서 실력에서 달리는 부분을 정치적 기반의 우월성으로 보충하려 했다.
사정이 그러니 자연히 사상검토의 헤게모니는 북한출신 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나는 남쪽출신 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남로당 계열과 조금이라도 연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구원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철학강좌 선생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그 고비를 넘겼다. 희생당한 선생은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지목된, 원산 덕원에 있는 독일계 수도원 사람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숙청 회오리에 말려들었다.
그는 학식이 높아 내가 좋아하던 선생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어느 날 그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우리 곁을 떠났는데, 그에게는 평안북도 출신의 잘 생긴 아내와 그 사이에 낳은 아이까지 있었다. 그가 잡혀간 뒤 나름대로 알아보니 그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밀경찰에 체포당한 뒤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은 그때까지 없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의 명예를 위해 여기에 이름을 밝혀두고 싶다.
그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있었다는 김진구였다. 철학강좌에는 비밀경찰의 끄나풀이 있었고 다른 강좌에도 있었는데, 이들은 내가 김진구 선생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끄나풀들은 김진구 선생이 나에게 아첨을 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감싼다고 비방하며 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의 간첩혐의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리에 그토록 충실한 사람이 간첩으로서 북에 잠입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비판당하자, 김일성은 그 기회를 잡아 당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소련계 파벌을 집중 공격했다. 그저 단순한 파벌적 인맥관계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개인숭배 비판에 동조하는 인텔리들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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