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8회]
  • 관리자
  • 2010-06-04 10: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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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는 강좌장들에게 교수들이 강의하는 걸 참관하고 교수안을 검열하라고 강조했지만 나는 그에 따르지 않았다. 교원은 자기가 아는 만큼 가르칠 수 있는 것인데, 공부는 시키지 않고 교수검열만 한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교수들이 그런 나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신에 나는 교수들과 세미나를 자주 열었다. 나는 대학총장과 대학 당 위원장의 신임을 받아 교원들을 대표하여 대학 당 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기 때문에, 학부장도 내가 하는 일을 제멋대로 간섭하지 못했다.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만 해도 북한 철학자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수준은 매우 낮았다.

그들의 지식이라야 일제 때 단편적으로 읽은 것이 고작이었고, 소련에서 파견되었다는 교수들의 수준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철학을 처음 대하는 만큼 교수들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줄 알고 강의를 들었다. 내가 유학을 가기 전에 김일성대학에서 알마아타 종합대학에 적을 둔 조선인 철학자가 철학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학교 교수들은 그가 소련애서도 이름 있는 교수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마침 알마아타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사람이 모스크바 대학 연구원으로 왔다. 그는 나보다 1년 후배였다. 내가 예전에 평양에서 소문났던 그 조선인철학자에 대해 물었더니 그가 바로 자기 조수였다고 말했다.

또 중앙당학교 교장으로 우리에게 철학강의를 하면서 뽐내었던 소련출신 조선인이 내가 유학하고 있을 때 고관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고 해서 만나본 적이 있다. 그런데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노어도 엉터리였다. 내가 그의 실력을 안 것도 모스크바에서 수학한 덕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노작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초기 북한의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가르쳤던 셈이다. 1954년 평양에서는 대대적인 복구사업이 벌어졌다. 학생은 물론 교원들도 모두 평양시내에 나가 건설노동에 참가해야 했다. 그래도 학교가 있는 백송리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간섭과 통제가 심하지 않아 공부하기에 유리했다.

난ㄴ 당시 『사회발전사 개요』라는 소책자와 꽤 여러 편의 논문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는데, 대학에서 받는 월급과 비슷한 액수로 상당한 금액이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1년에 1천여 장을 썼다. 그것도 교과서 집필을 제외한 분량이었다. 1955년 말, 평양에 있는 본교사의 복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대학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다음해인 1956년에 나는 집을 배당받았는데 상당히 좋은 집이었다. 나는 이사를 한 후 고향에서 줄곧 농사를 지으며 살던 부모님을 당장에 모셔왔다. 우리 집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 해 5월에 둘째딸 노선이 태어났다. 아내는 대학에서 각국 유학생들을 돌보는 사업을 맡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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