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7회]
  • 관리자
  • 2010-06-04 10: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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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나는 중앙당학교 이론반 6개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이론반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소련공산당 역사강의)를 담당할 대학교원 양성반이었다. 이 반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수준급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학교는 숭실전문학교 자리를 썼는데, 몇 동은 교실로 쓰고 몇 동은 기숙사로 썼다. 나는 뒤떨어진 공부를 메우기 위해 잠도 안 자고 매달렸다. 그래서 야간대학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철학에 취미를 가진 동무들과 철학연구소조를 조직하고 엥겔스의 저서『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을 학습했다.

이 학습을 통하여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자기철학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참다운 인생관이 없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우리를 지도하는 강사들 대부분은 소련에서 온 조선인들이었다. 교장은 김승하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소련에서 발간된 교과서로 철학강의를 했다.

이때부터 강습기간이 한 달 연장되었다. 그래서 우리 이론반은 8월 말에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졸업성적은 서로 비슷했으나 이런저런 경력이 앞서는 이들이 김일성대학에 배치되고, 나는 그 다음 부류로 인정되었는지 평양사범대학에 배치되었다. 배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중앙당 간부부에서 나를 호출했다.

“동무, 미안하게 됐소. 최창익 동무의 부인이 김일성대학 예비 과에 배치되었는데, 그 동무가 자꾸만 사범대학으로 보내달라고 하니 어쩌겠소. 미안하지만 김대 예비 과에 잠시 가 있어 주시오. 그럼 이내 원하는 대학으로 보내주겠소.”간부부에서는 오히려 내게 김일성대학에 가 있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최창익은 정치국원이고 연안파의 거두였다. 나는 군말 않고 김일성대학 예비과로 갔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나에게는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징용에 끌려가는 바람에 나는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공부에 몹시 목말라하던 참이었다. 예비과에서 사회과학과 논리학 강의를 맡아 강의를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연구원(대학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리하여 철학연구원으로서 공부할 수 있었다. 경제전문학교를 떠나오면서 세포위원장 자리를 송한혁에게 물려 준 나는 우연하게 연구원에서도 세포사업을 맡아 보게 되었다. 나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대학졸업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과목의 시험을 쳤다. 그때는 벌써 김일성대학의 본교사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본교사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 부근에 있는 큰 기와집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했다.

집주인 남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늘 나다니고 안집에는 젊은 부인과 어린 아이가 집을 지킬 뿐이었다. 그 맞은편 방에는 자취를 하는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방을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식사는 학생들과 함께 했다. 총각선생인 나에게 여학생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여자를 소개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기에도 바빠서 결혼은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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