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5회]
  • 관리자
  • 2010-06-04 10: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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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감으로서 학생들의 기숙사 생활도 돌봐야 했고, 게다가 수업시간도 더 늘어났다. 세포위원장은 학생들을 교양시키기 위한 과목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문맹퇴치사업에도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부담은 구역당 회의였다. 구역 당에서는 거의 매일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회의내용은 학교교육과는 관계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세포위원장 가운데는 주변 농촌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진행되었다. 쥐를 많이 잡아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양곡 낭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반동들과의 계급투쟁을 보다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 도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 신문독보화, 학슴회를 잘 진행해야 한다는 것 등등 소소한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회의를 했는데, 나로서는 정말 질릴 지경이었다.

밤새도록 회의를 하고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돌아가라고 했는데, 회의가 너무 빈번해지면서 먼 곳에서 온 세포윈원장들이 항의를 하고 나서자 당에서 그들에게 화물차를 내주었다. 그러나 나는 기숙사가 회의장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왔다. 혼자서 새벽길을 걸어오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왜 사람들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 하고 불평했지만, 그래도 공산당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무도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자신도 어느새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원들을 모아놓고 구역당의 지시를 전달할 때면 나도 모르게 구역당 관계자들과 같은 말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 자신도 열렬한 열성당원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학생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황 선생도 세포위원장이 되더니 빨갱이가 다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맹세컨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는 데 가담한 적이 없었고, 그 누구를 밀고한 적도 없었다. 학생들 중에는 반공산당 삐라를 뿌리고 툭하면 동맹휴학을 하는 패거리도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으면 가정방문을 통하여 학생은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해야 한다고 꾸준히 설득했다.

설득하며 다니지 말라는 내용의 삐라가 나에게 전달되어도 나는 겁내지 않고 그 일을 계속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거부하거나 공공연하게 부정행위를 했지만, 교원들은 그들의 단체행동을 맞지 못했다. 열심히 배우려는 학생들이 나에게 졸업반 시험감독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시험감독으로서 교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그들의 선배이고 또 그들로부터 선망을 받는다고 해도 만일 반항하는 학생이 나온다면 우선 망신스럽고, 또 부정행위를 발견하여 처벌한다 해도 얼마 안 있어 졸업할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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