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4회]
  • 관리자
  • 2010-06-04 10: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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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서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숙사가 마련되어, 나는 다시 기숙사 사감을 맡았다.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학교장이 바뀌었고, 당 책임교원도 새로 배치되어 왔다. 이 무렵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 창립되었다. 새로 온 교장은 남조선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중국 연안에서 활동했던 심재윤이었다.

심 교장은 외모가 단정하고 세련되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그는 자신을 훌륭한 혁명가로, 철학의 대가로 자처했다. 그리고 자신이 간부가 되지 못한 것은 최창익을 비롯한 엠엘파(마르크스-레닌파)들이 파벌감정에 사로잡혀 자기를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토오쿄오 제국대학 출신 공산주의자 김두용 등과 친교가 있었다.

심 교장은 말을 잘하고 외모가 번듯해 청년들에게 호감을 샀다. 나는 그를 선배로서 존경했고 그 역시 나를 아껴주었다. 잔정도 많아 밤늦도록 일을 하고 있으면 간식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철학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중국교재를 읽고 있을 뿐 철학사에 대한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걸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희랍철학이나 독일고전철학을 관념철학이라고 배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 세포위원장은 학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탈영하여 연안에서 일본군과 싸웠다고 주장하는 최규봉이었다. 그의 교향은 평안북도였다. 세포위원장은 나에게 협박조로 입당할 것을 권고했다. 심 교장도 입당을 권했다.

나는 당에 들어가는 게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 동료교사들도 선생을 하려면 당에 들어야 한다고 달래기에 입당원서를 냈다. 그리고 구역 당 심사를 거쳐 1946년 11월 16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입당원서에 기록된 나의 출신성분은 중농이었고, 사회성분은 사무원이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기록하는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해방 전에 일본에서 고학하면서 노동을 했고 징용 가서도 1년 6개월이나 노동을 했으면서 그렇게 쓰면 어떻게 합니까? 노동성분이 앞으로 출세하는 데 훨씬 유리하니 그렇게 고쳐 쓰도록 하세요.” “강제로 징용 나가 노동한 것이 무슨 노동잡니까. 출세할 생각은 별로 없으니 괜찮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입당원서를 냈다.

구역 당 위원장은 당증을 주면서 이 당증은 김일성 동지와 같은 당증이기 때문에 매우 영광스러운 당증이라고 강조했다. 1947년 2월 어느 날 세포위원장 최규봉이 사회안전부에 등용되었다. 구역 당에서 누구를 세포위원장으로 시킬 것인가를 심 교장과 최규봉에게 문의했는데, 그들이 나 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며 나를 적극 추천했다. 그리하여 나는 입당 3개월 만에 느닷없이 경제전문학교 당 세포위원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분주한 나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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