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0회]
  • 관리자
  • 2010-06-04 10: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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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와 우리 8명이 탄 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서로 눈짓을 했다. 차는 우거진 솔밭으로 난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단도를 감추고 손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헌병 지프차가 나타났다. 지프차가 전조등으로 신호를 하자 형사가 손을 들었다. 헌병 지프차가 화물차를 세웠다.

그러자 그 형사가 훌쩍 뛰어내려 지프차에 올라타고는 우리를 비웃듯이 가버렸다. 우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헌병 차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허탈해했다. 해방을 맞은 우리의 서글프면서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자화상의 일부였다. 우리가 춘천에 토착하여 여관을 잡아 든 시간은 밤 10시였다.

서울 용산 사단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삼척 출신의 한 청년이 일본인 분대장을 때려눕히고 탈영했다가, 삼척에서 징용을 살던 유학생들이 여관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병영생활을 얘기하면서 우리 청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손을 비롯한 여럿이서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지만, 나는 아직 내 진로도 결정하지 못한 처지이기도 해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일행은 모두 징용에 나간 것을 무슨 대단한 공로나 세운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인으로서 장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들떠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전동차를 조선사람들이 운행하는 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해서는 크게 실망했다.

경찰서와 파출소에 일본경찰들이 기관총을 걸어 놓고 시내치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만 되면 우리 세상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직도 일본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왠지 씁씁했다. 손을 비롯해서 남쪽이 고향인 학생들은 다른 숙소로 가고, 나는 고향친구를 따라 그 친구의 형님 집으로 가서 신세를 졌다.

학교 이름은 잊었는데, 그 친구의 형은 어느 단과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 집에 있는 동안 친구는 형과 함께 여운형 씨를 만나러 간다, 누구를 만나러 간다 했지만, 나는 그들을 따라다니기도 싱거워서 혼자 평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1945년 8월 20일 평양으로 떠났다. 집에 돌아와 보니 늙은 부모님의 살림살이는 내가 징용을 떠나면서 들렀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집채가 앞으로 기울어 곧 넘어갈 듯하여 아버지가 아카시아 나무를 잘라 기둥 대신 두 군데를 받쳐놓았고, 아궁이에는 물이 차 마당에 솥을 걸고 밥을 짓는 형편이었다. 승호리의 형수네 살림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도 화물차 운전수를 하는 둘째매부의 살림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학도지원병과 징용에 끌려갔다 온 젊은이들은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군도를 차고 보안대라고 적힌 완장을 두르고는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집안 살림이 너무도 궁색하여 나로서도 당장 무슨 일이든지 해서 부모님을 도와야 할 처지였다. 보통학교 동창생인 윤병선은 공산당에 들어가 중요한 조직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찾아와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공부는 이제 그만하고 새 정치에 참여하자. 이 북새통에 어떻게 공부를 더 한다는 생각을 하냐?” “어쨌든 일단 평양에 다녀와서 결정할게.” 나는 서울에서 동무들과 헤어질 때 고향에 다녀와 공부하는 길을 모색해 보겠다고 약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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