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9회]
  • 관리자
  • 2010-06-04 10: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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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과 귀향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한다고 해서 징용공들은 모두 손을 놓고 라디오 앞에 모였으나 잡음이 많아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8월 16일, 삼척 읍내로 들어갔더니 흰옷을 입은 조선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나누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독립된 조국을 위해 이 한 생명 어떻게 바칠 것인가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압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지금까지 무거운 무쇠가마를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훌훌 벗어던진 것 같았고, 또 억눌려 있던 내 키가 하늘을 향해 자꾸 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26명에서 8명으로 줄어든 우리 징용공들은 삼척 읍 유지들의 도움으로 8월 17일 목탄 연료로 하는 화물차편으로 서울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화물차에 태극기를 달고 의기양양하게 삼척 읍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헌병들에게 붙잡혀 태극기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차를 세운 헌병들 패망으로 잔뜩 독이 오른 자들과 대항하여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틀 동안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름은 잊었지만 당시 우리 일행 중에 싸움을 잘하는 손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는 토요쿄오에서 고학을 할 때부터 아는 친구였는데, 노동판에 나와서도 싸움을 잘해 감독이 하루 노임을 거저 줄 테니 제발 그냥 돌아가 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싸움 실력이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콘도오 타케시’로 통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를 감시하면서 괴롭혀온 조선인 형사를 혼내주고 떠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의 의견에 모두 찬동했다. 마침 그 조선인 형사도 우리와 같은 차편으로 춘천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형사가 차를 타려고 여관으로 왔다. 나이는 35세 정도로 유도나 검도를 한 듯 몸이 매우 날쌔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8명이었고 단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 아무 두려움 없이 형사를 둘러쌌다.

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민족의 반역자이므로 마땅히 처단되어야 한다.” 그러자 형사는 태연하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들을 해친 적이 없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우리는 자그마한 단도를 믿었는데 그자가 권총을 뽑아들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이 다시 나섰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야. 당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형사로서 당신들을 감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실지로 당신들을 해치지는 않았어. 일본이 망했다고 당신들이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돼.”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권총을 당할 수 없음을 안 손이 마무리를 했다. “좋다. 그 문제는 앞으로 기회 있을 때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그리고는 싱겁게 그자를 놓아주었다. 손이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서 처단하기는 어려워서 그냥 보냈다. 그래도 우리와 같이 간다니까 가다가 외딴 곳에서 기회를 봐 죽이자.” 이번에도 우리는 모두 찬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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